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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다시 ‘징비록’을 회고한다
입력 : 2019년 08월 12일(월) 22:42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은 참혹했던 전란(戰亂)의 기록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7년간 이어진 전란(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실상을 피눈물을 머금은 채 회한으로 써서 남긴 후대의 지침서다. 전란의 한 가운데서 영의정 겸 삼도 도체찰사라는 직책을 수행했던 서애는 징비록의 서문에 “매번 지난 난중(亂中)의 일을 생각하면 황송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알지 못해 왔다. 그래서 한가로운 가운데 듣고 본 바를 대략 서술했으니…(중략)”라고 밝혔다.

서애는 또 이 기록의 의미와 관련해 “비록 볼만한 것은 없으나 역시 모두 당시의 사적(事蹟·일의 행적)이라 버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징비록이 귀중한 사료임은 이를 쓴 서애의 전란 당시 위치나 기록의 객관적인 목적성에서 입증되는 바다. 전화(戰禍)의 배경은 물론 조정의 무능한 대응 및 여러 실책들을 가감없이 드러내 처절하게 반성함으로써 앞날을 대비케 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더불어 여러 차례에 걸쳐 심각한 민심 이반 현상을 기술해놓은 것은 징비록의 도드라진 기록이기도 하다. 전란 초기 임금과 밥값 못하던 조정 관료들이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황망하게 피난길에 올랐을 때 들끓었던 민심을 소상하게 기록했다.

기록에 따르면 조정에 대한 민심의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무기를 든 백성들은 왕의 행차를 가로막고 묘사(廟士)의 신주를 패대기 쳤다. 재신(宰臣)들에게는 “나라의 녹만 훔쳐 먹다 이제 와 나랏일을 그르치고 백성을 속이려 드는가”는 호통도 서슴치 않았다. 백성들은 “(도)성을 버리고 가려면 무슨 까닭으로 우리를 속여 성안으로 들어오게 해 적의 손 안에 넣어 어육(魚肉)이 되게 하려느냐”고 핏발을 세웠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나 왜구의 침탈이 재연됐다. 그 때와 다름없이 시민들은 일본 제품 불매 운동과 반일 규탄 시위에 나섰다. 왜란 당시 의로운 깃발을 들었던 갑남을녀들의 굳센 저항의 변형이다.

무능했던 선조와 달리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않을 것이다”고 단호하게 언급했다. 정부의 강건함과 시민들의 굳셈이 어우러져야 한다. 서애가 징비록을 통해 남겼던 “미리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는 지침을 되새기면서.김영태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