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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획- 박해현의 새로 쓰는 광주·전남 3·1운동사<11> 민족 독립운동의 성전에 피를 뿌린 영암 구림의 영웅들下
4월10일 시위 참여 인원 최소 1천명은 넘었다
구림 시위로 수십여명이 체포되었다.
최민섭·박규상(징역 1년 6월),
김재홍·최기준·정학순·
조병식(징역 1년) 등
6명은 징역형,
정상조·조희도·박성집·박흔홍 등
입력시간 : 2019. 03.20. 00:00


구림 3·1운동 기념탑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이 있다. 3월 현재까지 15,511명이다. 구한말 의병 운동에 참여한 지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 통계에서 흥미 있는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광주·전남 지역(제주 제외) 유공자는 약 7%에 해당하는 1,125명이다. 3·1운동 유공자는 34%에 달하는 5,290명인데, 광주·전남 지역은 248명으로 전체의 4.7%를 차지하고 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광주·전남 3·1운동 참여 인원을 전국 202만명의 5%인 95,850명이라고 파악한 비율과 비슷함을 알 수 있다. 3·1운동 당시 광주·전남 지역의 시위가 ‘혈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최소한 10만 명은 넘을 것이라는 추정이 설득력이 있음을 유공자 현황이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광주·전남의 시위 참여 인원을 겨우 9천30명(국편 파악의 0.9%) 정도로 파악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통계가 얼마나 무성의한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겠다.

시위 지도부가 구성되어 조직적으로 전개된 구림의 4월 10일 시위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불행히도 ‘혈사’에는 영암 지역의 통계가 누락되어 있다. 영암 지역 주요 인사들 대부분이 3·1운동 때 체포되어 임시정부와 연락망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껏 ‘혈사’ 통계를 가지고 전국 218개 군 가운데 211개 군이 참여하였다고 살폈는데, 이 또한 재검토해야만 함을 영암의 사례는 말해주고 있다.

영암 시위 규모를 다룬 가장 최근의 연구를 보면 영암 1천명, 구림 300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논의의 편의상 구림을 살펴보겠다. 구림 지역 시위 규모를 300명으로 파악하고 있는 근거는 구림보통학교 앞에 ‘里民 300명’이 모였다는 재판 기록 때문이다. 그런데 4월 10일 시위에는 ‘구림里民’ 뿐만 아니라 군서면민 전체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구림보통학교 학생들도 교실을 뛰쳐나와 시위에 가담하였다. 당시 재학생의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00~300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독립선언서 500매, 독립신문 500부 등이 인쇄되어 구림과 영암시장 시위에 사용되었다. 이렇게 보면 구림 시위 참여 인원은 최소 1천여 명은 넘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시위 규모를 파악할 때 이처럼 여러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실상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구림 시위로 수 십 여 명이 체포되었다. 최민섭·박규상(징역 1년 6월), 김재홍·최기준·정학순·조병식(징역 1년) 등 6명은 징역형, 정상조·조희도·박성집·박흔홍 등 4명은 태형 90대의 형을 받았다. 당시 영암읍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이 조극환 징역2년·김민규 징역1년, 김학용 태형 90대, 나머지 10명 집행유예 형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구림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일본 당국이 얼마나 보복을 철저히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구림 시위를 다룬 대부분 글들이 재판에 넘겨져 처벌 받은 사람을 10명으로 살피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재판 기록을 보면 태형 90대를 받은 최한오가 나온다. 그 역시 구림 출신이라고 주소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구림 시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구림 시위로 재판에 넘겨진 인물들은 모두 11명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다만, ‘독립운동사’ 등에서 최한오가 구림 시위 준비단계 부터 적극 참여하였다고 살핀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재판 기록을 보면 그는 시위 당일 교실까지 들어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적극 참여한 것으로 나와 있을 뿐이다. 시위 주동자가 모두 징역형을 받은 것과 달리 태형을 받은 것을 볼 때 단순 가담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박규상 지사 기적비(구림)


한편, 징역 1년 형을 받은 조병식 지사는 ‘3·1운동 희생자 명부’에 의하면, 목포 형무소에서 숨졌다고 한다. 박규상과 함께 처음부터 시위 준비 단계부터 적극 참여하였던 그는 시위대를 앞장서 이끌었다. 군서면사무소까지 들어가 만세를 불렀다고 재판 기록에도 언급되고 있다. 그가 형무소에서 순국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유공자 명부에는 1926년 사망하였다 한다. 3·1운동 당시 28세의 젊은 나이를 고려하면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

‘명부’에 등재된 또 다른 순국지사 정상조의 경우 시위 당일 앞장서 만세를 부르고 제지하는 교사들을 밀치고 교실까지 들어가 학생들의 참여를 권유하는 등 시위에 적극 참여하다 ‘태형 90대’의 형벌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38세였다. ‘명부’에는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유공자 명부에는 1927년 사망하였다 한다. ‘태형’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서호강물을 용솟음치게 하고 월출산을 진동시킬 정도로 대규모 만세 시위를 조직적으로 전개하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박규상, 역시 고문으로 순국한 조병식·정상조 등은 민족 독립 운동의 성전에 피를 뿌린 자랑스러운 광주·전남의 영웅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암·구림 시위로 재판받은 26명 가운데 2019년 3월 현재 15명의 애국지사들이 ‘독립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엊그제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상조 등과 함께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한 박성집 선생이 새롭게 유공자로 등재되었다. 구림 출신 가운데 최민섭·최한오를 제외한 9명 전원이 포상자 명부에 등재된 셈이다. 시위로 처벌받은 독립지사들이 이처럼 100% 가까이 포상자로 이름을 올린 사례를 필자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후의 친일 행적 등으로 공적 평가가 여의치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림 지역 독립지사들의 항일 의지가 유난히 돋보인다.

이처럼 ‘里’ 단위의 구림 마을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조선 중기부터 내려온 그 지역 토착 세력들의 강고한 유대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구림은 함양박씨, 낭주최씨, 해주최씨, 창녕조씨 등 4대 문중이 서원, 향약을 중심으로 향촌 사회를 오랫동안 이끌어왔다. 특히 구림 대동계는 4대 문중이 하나로 결집되어 구림 마을의 정체성을 키워온 구심점이었다. 이러한 강한 연대감이 독립만세 운동의 에너지를 조직적으로 분출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실제 시위 과정에서 이들 네 문중이 하나가 되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구림 대동계 모습.


또한 구림보통학교의 전신이 된 근대적인 사립학교를 구림 대동계가 중심이 되어 1907년 세웠다. 이처럼 구림 지역이 개화의 물결을 적극 받아들였던 것도 근대 민족의식이 일찍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산지중해로 향해 열려있는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은 마한이래로 항상 새로운 문물의 유입에 능동적이었다. 따라서 구림의 영웅 박규상 선생처럼 경성 등으로 유학하여 세계사의 변화를 일찍 살폈던 선각자들이 많았다. 이들 젊은 지식인들이 구림의 3·1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림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한국사의 과거와 현재가 응축되어 일어난 항쟁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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