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터)故 김복동 할머니

@김옥경 입력 2019.01.31. 00:00

"천억을 줘도 안받는다."

"증거가 없다구요. 내가 바로 증거입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 중 하나다. 지난 2017년 개봉한 이 영화는 악명 높은 한 할머니를 소개하며 시작된다. 이 할머니는 온 동네를 휘저으며 무려 8천건에 달하는 민원을 넣어 '도깨비 할매'라고 불리는 '옥분'이다.

20여년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그녀 앞에 원칙주의 9급 공무원 민재가 나타나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민원 접수 만큼이나 열심히 공부하던 영어가 좀처럼 늘지 않아 의기소침한 옥분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민재를 본 후 선생님이 돼 달라며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부탁한다.

옥분이 고령의 나이에도 그토록 영어를 배우려고 한 이유는 특별했다. 옥분은 일제강점기 시절 위안부 피해자였고 이를 숨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전 세계를 다니며 위안부 관련 증언을 영어로 하던 친구 정심이 치매에 걸려 증언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친구를 대신해 자신이 미국에 가서 위안부 관련 결의안 상정을 위한 증언대에 서기로 결심한다. 미국에 도착해 증언하기 전날 옥분은 뜻밖의 난관에 부딪히고 증언을 못할 상황에 봉착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깜짝 등장한 민재의 도움으로 위안부 참상과 일본의 과거 잔혹상을 전세계에 알린다.

언뜻보면 코미디 영화인듯 보이는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시절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복동 할머니의 실제 삶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순히 심각하고 어둡게만 다뤘던 기존 영화들과 달리 온 국민이 함께 공감하며 인지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 위안부 피해자이자 산 증인인 김복동 할머니가 93세의 일기로 최근 타계했다. 김 할머니는 영화에서처럼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당당하게 알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어느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로 대표된다.

실제 김 할머니는 지난 1992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하며 여성 인권 운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의 잔혹한 만행을 당한지 60여년 만의 일이었다. 또 지난 1992년 8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위안부 피해 증언을 시작으로 199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전 세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렸다.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에 원고로 참여해 실상을 문서로 증언하기도 했다. 암투병 중이던 지난해 9월엔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길 유언은 "일본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끝까지 싸워 달라"였다. 우리에겐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김옥경 문화체육부 부장 okkim@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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