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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획 박해현의 새로 쓰는 광주·전남 3·1운동사 <2> 일제, 광주·전남의 3·1운동 규모 축소·조작
총독부 철저 감시·통제 뚫고 뜨거운 독립의지 쏟아내
입력시간 : 2019. 01.09. 00:00


백암 박은식(임시정부 2대 대통령)
3·1운동에 광주·전남 지방이 적극 참여하였다고 하는 것을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이하 혈사)의 기록을 통해서 살필 수 있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1914년에 결성된 '독립의군부'라는 비밀무장결사에 이 지방 출신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던 것도 운동의 역량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면 왜 그동안 광주·전남 지방에서 3·1운동에 참여도가 낮았다고 하는 연구가 나왔던 것일까? 살펴볼 필요가 있다.



3·1운동을 다룬 기존의 연구들은 대체로 조선총독부가 3·1운동을 진압하고 작성한 '소요사건별표'와 '소요사건일별조표'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3·1운동 가담자 수에 있어 호남 지방은 전북 3,710명, 전남 2,868명으로 경기 129,528명, 충북 32,730명, 충남 40,000명보다 훨씬 적고, 시위 횟수도 3월 1일부터 4월 10일 사이에 경기 288회, 충북 56회, 충남 75회에 비해 전북 5곳 39회, 전남 10곳 44회로 매우 적은 숫자를 보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살피면 광주·전남 지방은 3·1운동 참여가 미약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광주·전남 지방의 3·1운동은 타 지역보다 소극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처럼,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출판된 박은식의 '혈사'에는 전남·북 지방에서 일어난 시위 횟수를 222회로 파악하여 총독부의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반면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우 '혈사'에 297회와 156회로, 총독부의 288회, 133회 기록과 거의 비슷하다. 말하자면 호남을 제외한 여타 지역의 시위 횟수에 대한 총독부 기록이 박은식 선생이 조사한 것보다 적게 나와 있기는 하지만 차이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전라도 지방의 경우만 두 자료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까닭이 궁금해진다. 박은식 선생이 조사한 통계가 유독 전라도 지역에서 착오를 일으켰을 가능성과 반대로 총독부가 전라도 지방의 시위 규모를 의도적으로 축소했을 가능성, 두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3·1절 1주년 기념식(미국캘리포니아)


그런데 1972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독립운동사'에 의하면 전북 지방의 경우 50여 곳에 수만 명이 참여하였고, 전남 지방의 경우 53곳에서 수만 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물론 '독립운동사' 또한 총독부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한계가 없지는 않으나 총독부 기록보다 많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광주·전남의 모든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불발로 끝난 경우를 제외하고도 각종 자료에서 확인된 횟수만도 90여회에 이른다는 최근의 연구 성과가 있다. 전북의 경우도 각종 자료에서 확인된 시위 횟수가 184회나 달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혈사'의 내용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곧, 총독부의 호남 지방에 대한 시위 횟수 기록이 의도적으로 축소, 조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투옥된 숫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1919년 4월 16일 기준으로 시위로 인해 수감된 인원을 지역 소재 형무소 별로 살피더라도 전북 230명(5.2%), 전남 162명(3.7%)으로 전국 수감자의 8.9%에 달하고 있다. '혈사'에서 전라도 지방의 투옥자 비율이 전체의 6.2%를 차지한다는 통계보다 오히려 높게 나오고 있다. 말하자면 총독부 기록에 보이는 시위 횟수가 전남·북 합하여 전국의 1.4%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잘못되었다고 총독부 스스로 인정한 셈이라 하겠다. 이러한 자가당착은 광주·전남북 지방의 시위를 총독부가 의도적으로 축소, 조작하는 과정에서 야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이러한 총독부의 통계를 토대로 호남 지역의 시위에 대한 분석을 하여 소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살피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일제 헌병대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3월 상순에 불온문서의 배포 등이 있었으나 소요가 구체화 된 것은 없었다. 3월 10일 이후 광주에서 소요가 있었지만 4월 18일까지 10개소, 14회의 시위가 있었다"라고 하여 광주·전남 지방의 시위를 매우 미약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3월초 경성에서 운동이 발생하자 각 도 경무부장이 교직원, 종교 지도자, 단체 및 관리 등에 대한 훈육을 강화하고 감시와 사찰, 취체, 정찰, 밀고, 설득, 폐시(閉市) 등을 철저히 한 결과라고 자체 평가까지 하였다. 말하자면 전라도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고 한말 의병 전쟁의 최후의 격전지였기 때문에 전라도 소재 군경의 운동의 사전 예방 활동이 타 지역보다 훨씬 주도면밀히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호남 지역의 시위가 총독부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결코 미약했거나, 그 투쟁 강도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시위 횟수, 참여 인원, 사망자, 부상자, 투옥된 인원 등이 말해주고 있다. '혈사'에 수록된 사망자 수와 부상자 수만 보더라도 경상도가 가장 많고 평안도, 경기도,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가 뒤를 잇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 스스로 인정했듯이 호남 지방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전남 지방에서는 그것을 뚫고 독립의 의지를 뜨겁게 쏟아 내고 있었다. 별도로 다루겠지만 광주·전남 지역의 시위에서는 이른바 지도급 인사들보다 일반 민중들이 시위를 주도한 경우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3·1운동으로 처벌받은 기독교인들을 보면 평신도가 징역형 93%, 집행유예 85%에 달할 정도로 목사나 장로 급 인사들보다 월등했다. 이러한 것은 동학농민혁명과 항일의병전쟁을 통해 형성된 민중들의 항일 의식이 3·1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광주·전남 지방의 이러한 시위 양상을 어느 지역보다 주목하였을 법하다. 따라서 전남·북 경무부에서는 다른 지역으로의 파급을 염려하여 시위 규모를 의도적으로 축소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격렬하지 않은 시위는 누락시켜 규모를 축소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광주·전남 지방에서 일어난 시위가 얼마나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지역의 3·1운동이 다른 지역보다 소극적이었다거나 강도가 미약하였다고 하는 기존 견해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문학박사·동신대 기초교양대 강사


박해현        박해현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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