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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49> 미륵사의 사랑 선화공주
적국의 사내와 사랑으로 평화와 안식 소망
입력시간 : 2018. 12.18. 00:00


미륵사지 서탑
'선화공주주은(善化公主主隱) 타밀지가랑치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방을(薯童房乙) 야의란을포견거여(夜矣卵乙抱遣去如)'

일연의 삼국유사 기이편 무왕조에 있는 서동설화의 서동요다.

'선화공주니믄 남 그스지 얼어두고 맛둥바알 바매 몰 안고가다.'인데 쉽게 풀어보면 '선화 공주는 남 몰래 시집가 놓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이다.

백제 말엽이다. 한 처녀가 백제의 서울 사비성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의 익산 마룡지거나 부여 궁남지인 그곳에서 처녀는 못의 용과 사랑을 나누고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백제 30대 무왕인 부여장(夫餘璋)이다.

여기서 못의 용은 백제 제29대 법왕이다. 이 법왕의 왕자 시절 사랑 이야기가 용 설화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때 태어난 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서동(薯童)이다. 어려운 가계를 돕느라 늘 마(薯)를 캐어 팔아서 이름이 되었다.

선화공주는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 공주다. 선화는 재색을 겸비한 아리따운 처자였다. 이 소문이 백제 땅까지 전해졌다.

소문을 들은 서동은 머리를 깎고 신라로 갔다. 마를 캐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친해졌다. 오래 사귀면 친구(親舊)이고, 함께 먹을 걸 나누면 친구(親口)이다. 아이들과 친구가 된 서동은 노래를 짓고 춤까지 가르쳤다.

아이들의 노래와 춤은 삽시간에 신라 서울 서라벌의 유행가가 되었다. 노래는 서동요요, 춤은 '경주 스타일'이었다. '강남 스타일'의 경쾌한 마(馬)춤과 서동의 흥겨운 마(薯)춤이 시공을 넘어 같은 이름인 게 우연이 아닌 듯싶다.

익산 미륵사지 모형도


신라 대궐에서는 난리가 났다. 공주가 바람이 났으니 조용히 넘어갈 수가 없다. 대신들은 공주를 유배 보내자 했고, 왕도 이에 응했다. 다만 왕후는 공주가 가엾어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선화공주의 귀양길에 서동이 나타나 절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으나 믿고 좋아했다. 또 서동(마동)의 이름을 알고 서동요의 의미를 알았다. 그리고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내어놓았다.

"이게 무어요?"

"황금이지요."

"이런 거라면 내가 마를 캐던 산에 흙처럼 많이 있소."

선화공주는 크게 놀랐다.

"황금은 천하의 진귀한 보배라오. 당신의 보물을 우리 부모님께도 보내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그리하여 서동이 마를 캐던 익산 오금산의 황금이 신라로 갔고, 서동은 뒤늦게나마 진평왕의 신임을 얻었다. 또 선화공주는 곧 아들을 낳았으니 백제의 마지막 왕 부여의자이다.

서동은 차츰 백제왕실에서 세력을 굳혀 600년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고 선화공주는 왕비가 되었다.

당시 백제 왕실은 어수선했다. 백제 제27대 위덕왕이 44년 동안 집권하다가 598년 12월에 73살로 죽었다. 위덕왕의 동생 혜왕이 70세가 넘어 제28대 왕이 되었으나, 이듬해인 599년에 죽었다. 이어 혜왕의 아들 법왕이 제29대 왕으로 즉위했으나 이듬해인 600년 5월에 또 죽었다. 혜왕, 법왕이 모두 다 1년여 만에 죽은 것이다.

서동은 그 법왕의 아들이었으나 적자가 아닌 서자였다. 백제의 서울인 사비가 아닌 익산에 살아서 왕실이나 귀족들의 지지나 지원도 별로였다.

하지만 적국인 신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만큼 지략과 지혜가 뛰어났다. 또 선화공주와 신라의 은밀한 지원도 있었을 거로 여겨진다.

그렇게 서동은 불리한 조건과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국외 정세의 불안, 귀족 간의 내분, 왕실 권위의 약화를 틈타 법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이다.

그 어느 날이다. 선화왕비와 무왕이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밑의 큰 못에 이르렀다.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선화왕비가 무왕에게 간청을 했다.

"이 곳에 큰절을 세웁시다. 제 소원입니다."

선화왕비의 간청으로 여러 해에 걸쳐 공사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639년 미륵삼존의 상을 세우고 전과 탑과 묘무를 배치한 뒤 미륵사라 하였다. 그 미륵사의 탑이 1400여년의 세월을 버텨 그날의 사랑 얘기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하지만 선화왕비는 미륵사의 준공을 보지 못한 듯하다. 2009년 미륵사 서탑의 해체보수 공사 중 기단부 심초석 구멍에서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그리고 사리봉영기를 통해 좌평을 지낸 사택적덕의 딸이 기해년(639)에 미륵사를 준공하고 탑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무왕의 왕비가 선화와 사택 두 사람이 된 셈이고, 미륵사의 준공을 사택왕비가 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선화왕비는 미륵사가 완공되기 전에 세상을 뜬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선화왕비의 아들인 부여의자가 무왕의 첫째 아들임에도 40살이 넘어선 632년(무왕 33년) 정월에야 뒤늦게 왕태자로 책봉된 이유도 짐작이 된다.

어머니가 신라계인 선화왕비인데다 백제의 실권귀족 사택왕비가 있었기에, 백제의 왕실과 귀족들은 부여의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여의자 역시 그의 아버지인 무왕처럼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641년 아버지 무왕이 죽자, 백제 제31대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642년이다. 의자왕은 계모인 사택왕비가 죽자 왕비의 자매들 딸 4명과 내좌평 기미, 이복 아우인 왕자의 자식 교기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였다. 백제에 '큰 난리가 일어났다'고 일본서기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1400여 년 전, 그날의 일을 정확하게 알 수야 없지만 선화와 서동, 미륵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며 서동요도 삼국유사에 실린 14수 신라 향가의 하나다.

아무튼 신라인들은 적국의 사내 서동의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백제인들도 적국의 선화공주를 왕비로 기꺼이 맞이했다. 두 사람의 사랑으로 평화와 안식을 찾고자 했다. 덧붙여진 황금은 부귀와 풍요, 미륵사는 후세, 후대의 안녕과 번영의 소망이었다.

그렇게 미륵사로 승화된 선화와 서동의 사랑은 참혹한 전쟁, 왕과 귀족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평화와 안식, 부귀와 풍요, 만년세세의 안녕과 번영을 염원하는 꿈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백제는 의자왕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얘기는 천년의 세월 넘어 우리에게 있다. 동화작가


양기생        양기생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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