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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48> 노력과 열정의 신화 국창 김소희
소리뿐만 아닌 전통예술 전반 사통팔달의 예인
입력시간 : 2018. 12.04. 00:00


김소희 생가
국창이라 불리는 국악의 별들이 있다. 그러나 다 같은 별이어도 더욱 빛나는 별이 있기 마련이다. 김소희는 그런 별이다.

국창이라 불린 김소희는 1917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순하고 살결이 백옥 같다는 뜻의 순옥이었고, 아명은 돌림자를 딴 옥희였다.

1929년 12살 때다. 고향인 흥덕에서 흥덕보통학교를 마치고, 광주로 시집을 갔던 언니에게 와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김소희는 이화중선의 협률사공연을 보고 푹 빠졌다. 마친 신들린 것처럼 이화중선의 소리에 이끌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공연장엘 갔다. 그리고 심청가의 눈이라 할 수 있는 '추월만정' 대목을 그럴듯하게 흉내 낼만큼 소리의 세계에 푹 빠졌다.

1930년이다. 김소희를 지켜보던 형부가 송만갑 문하에 입문시켜 주었다. 그 인연으로 '심청가'를 배웠고 6개월 정도 지나자 애기명창으로 알려졌다. 송만갑이 시골로 떠나고, 김소희는 이화중선의 소개로 창극 무대에 올랐다.

김소희 공연모습


1931년에는 남원춘향제 민속예술경연에서 1등상을 받으며 김소희는 한층 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 해 12월 29일 김소희는 상경하여 한성주의 주선으로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였다.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와 강상풍월, 장부가 등을 불러 노래와 이름을 알렸다.

김소희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노력하는 예능인이었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스승을 찾아 자신을 갈고 닦았다. 전계문에게 가곡과 시조를,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이듬해인 1933년 정경린에게 무용을 배우고 익혔다.

이때부터 스승들과 나란히 레코드 취입도 했다. 레코드 취입을 위해 정정렬, 한성준, 오태석 등과 일본에 가기도 했다.

김소희 추모회에서 열창하는 딸 박윤초


1934년에는 정정렬에게 판소리를, 김종기에게 가야금을 배우고, 이듬해인 1935년에는 빅타레코드의 전속 소리꾼이 되었다.

1936년 2월에 조선성악연구회의 직속단체로 창극좌가 창단되었고 강태홍, 김세준, 김연수 등과 함께 창극 활동을 펼쳤다. 이 해 6월 11일에는 빅타축음기에 춘향전을 전편 취입했고, 한성준의 장구반주로 취입한 단가 '강상풍월' 등을 일본 콜럼비아 음반에 취입했다 또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이동백 판소리 은퇴 공연 무대에 올라 재능을 보여주었고, 1939년에는 만주 하얼빈으로 순회공연을 갔다.

1938년에는 박동실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며 1940년에는 화랑창극단의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이도령 역의 박후성과 함께 청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1945년에는 광복의 기쁨과 함께 김소희는 정응민, 김여란, 정권진, 김연수 등을 찾아 판소리의 깊이를 더했다.

훌륭한 스승에 훌륭한 제자가 있기 마련이다. 김소희는 내로라하는 명창 스승들을 부지런히 찾아가 그들의 지닌 판소리의 재능을 전수 받은 덕분에 박유전, 이날치, 김채만, 박동실로 이어지는 서편제의 흐름과, 박유전, 정재근, 정응민으로 이어지는 서편제의 또 하나의 흐름, 그리고 송흥록, 송우룡, 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동편제의 흐름까지 꿰뚫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김소희 추모회에서 열창하는 딸 박윤초


그렇게 김소희의 발성은 탁하면서도 맑고, 깊으면서도 밝았다. 가곡발성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그 청아하고 미려한 음성은 가곡이나 시조를 불러도 흠 한 점 잡을 수 없었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김소희는 그렇게 소리뿐만 아닌 전통예술 전반에 걸쳐 사통팔달의 예인이었다. 14세 무렵에 전라북도 정읍의 손창식에게 승무를 처음 배웠던 김소희는 훗날 전주의 정성린에게서 그 승무의 격을 한층 더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신조열, 윤석호 등 한문학자를 찾아 한문과 사설을 공부했다. 그들의 판소리 사설에 대한 이론을 꼼꼼히 외우고 붓글씨로 적어가며 서예까지 공부했다. 1966년, 1968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예부문에서 상을 받은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옥이나 뿔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절차탁마가 또 이를 이르는 말이다.

김소희의 노래와 춤은 관중의 넋을 홀딱 빼어놓았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의 심청가에서 김소희는 들고 있던 부채를 무대바닥에 떨어뜨리면서 그 장면을 그려냈다. 또한 나비가 나풀나풀 날 듯, 예서제서 꽃이 활짝 피어나듯 무대를 오가는 춤사위는 김소희만이 할 수 있는 명연기였다.

광복은 김소희의 활동무대를 더욱 넓혔다. 1948년 김소희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설립해 이사가 되고,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여성 국극인 '햇님 달님'을 무대에 올렸다. 어려운 형편이라, 공연 경비를 최소한으로 줄여 어렵게 만들었는데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이 공연으로 여성 국극은 전성기를 맞으면서 196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김소희는 자신이 수많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후배와 후학들의 배움에도 남다른 안목으로 열정을 쏟았다. 1970년부터 1993년까지 자신의 가산을 팔아 세운 국악예술고등학교 재단이사, 1993년에는 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국악 발전을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첫 시작은 가시밭길이었으나, 수많은 영광과 상훈이 김소희 곁으로 다가왔다. 1959년 국악진흥회의 제4회 국악상, 1962년 세계방송대상,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 196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예 입선, 1971년 유네스코 제2회 아시아 음악제 방송 적합성 부문 우수상,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2년 초대 한국국악대상, 19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7년 남원시 예술문화대상, 1991년 서울시 문화상 초대 동리대상, 1992년 춘향문화대상, 1994년 제1회 방영일 국악상 등이 그것이다.

김소희는 거문고로 유명한 박석기와의 사이에 1녀2남을 두었다. 그리고 1995년 4월 17일 78살에 청출어람, 절차탁마의 노력과 열정의 신화, 국창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갔다. 그 빛나는 이름에 걸 맞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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