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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46> 베틀굴의 여 장수 경주 최씨
입력 : 2018년 10월 30일(화) 00:00


베틀 돌리며 왜적 막아낸 충절의 상징
보성은 예로부터 삼의 고을이었다.
삼으로 옷감을 만드는 기술을 지닌
여인들이 많았다.
경주 최씨는 여인들의 솜씨를 살펴
실을 뽑는 일, 베를 짜는 일,
옷을 만드는 일 등
보성 충절사
보성 초암산 베틀굴의 여 장수 경주 최씨는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예와 병서, 과거의 무과를 담당하던 훈련원의 종4품 첨정 최한손이고, 어머니는 광주 이씨 이유정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족보에 실리지 않아 경주 최씨로만 남았고, 일제 강점기에 최대성 장군 후손들인 문정공파가 탄압을 받으면서 행적도 사라져버렸다.

경주 최씨의 오라버니인 의병장 최대성은 1553년 2월 8일, 보성 겸백면 사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남달리 컸다. 의롭고 착하여 힘들고 어려운 일에 앞장서고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못 본 체 하지 않았다. 또 일찍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무예도 좋아하여 문무를 겸하였다는 칭찬을 받았다.

선조 18년인 1585년, 32살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리고 여러 벼슬을 거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3품 '훈련원정'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훈련원정의 신분으로 이순신의 막하에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거제, 옥포, 한산, 합포, 마산포, 가덕도, 당항포, 웅포 해전 등 남해의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이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 무렵에 이순신은 투옥이 되었고, 조선의 수군은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큰일이다. 남해가 무너지면 호남이 무너지고, 호남이 무너지면 조선이 위태롭다."

최대성은 아들인 최언립, 최후립은 물론 집안의 노비들까지 총동원하고, 전 재산을 내놓아 의병 5백여 명을 모았다. 모의장군(募義將軍)이란 기치를 달고 의병장이 되었다. 의병은 남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최대성의 부인과 여동생은 물론 수많은 여성들이 함께 나섰다. 이때에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경주 최씨가 오빠에게 청했다.

"오라버니! 지난 임진년 왜란에 아이와 노인, 여성들이 왜적에게 희생을 당했지요. 이번에는 미리 준비를 했으면 하지요."



"좋은 생각이다. 무슨 계획이 있느냐?"

"아녀자, 노인들과 함께 금화사로 가겠어요. 그리고 계획이 있지요."

보성군 겸백면과 미력면에 걸쳐있는 초암산이 있다. 이 초암산의 옛 이름은 금화산이다. 이 초암산 중턱에 백제 때의 절 금화사가 있고, 바라보이는 절벽 사이에 길이 20여m의 굴이 있었다. 바로 베틀굴이다.

경주 최씨는 여성들을 이끌고 금화사와 베틀굴이 있는 금화산으로 피난을 했다. 그리고 단순히 피난만 한 게 아니었다.

"우리도 이곳에 숨어만 있을 게 아니오. 의병들이 입을 군복을 만듭시다."

최씨 부인은 여성들에게 베틀과 옷감을 만들 재료들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금화사와 베틀굴에서 5백여 명 의병들의 군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보성은 예로부터 삼의 고을이었다. 삼으로 옷감을 만드는 기술을 지닌 여인들이 많았다. 경주 최씨는 여인들의 솜씨를 살펴 실을 뽑는 일, 베를 짜는 일, 옷을 만드는 일 등 각기 할 일을 나누었다. 그리고 오빠의 군복을 본보기로 삼아 군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총탄환이 솜을 잘 뚫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군복에 두툼하게 솜을 넣었다.

의병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왜적이 몰려오면 제일 큰 걱정이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여성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금화사로 피신을 한데다, 군복까지 만들어 주니,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1597년 3월이다. 최대성이 광양에서 순천 광양 등지의 왜적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가등청정의 왜선 300여척이 전라도로 몰려왔고, 그 중 10여척이 지금의 득량면 예당인 예진으로 들어왔다.

최대성은 급히 의병을 이끌고 득량면 죽밭들 해변에서 그들을 섬멸하고 다시 고흥 연안의 망저포에 침입한 적까지 격멸하였다.



또 한달 뒤인 4월이다. 최대성은 벌교포, 대포, 장암포, 영등포 등을 침입한 왜적을 쳐 부셨다.

그렇게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 없는 사이, 육지로 올라오는 왜선을 막고 있을 때였다. 백의종군의 이순신이 다시 전라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순신 장군이 오신다 하오. 군량과 군선, 병사들을 모읍시다."

최대성은 자신의 재산부터 모두 내놓아 군량을 모았다.

1597년 8월 9일이다. 이순신이 보성 조양청에 이르렀다. 이틀 뒤인 8월 11일에는 득량의 박곡 마을에서 묵었다. 이때 최대성은 의병장 송희립과 함께 이순신을 찾아갔다.

"장군님이 다시 오시니 없던 힘도 납니다. 우리들이 군량을 모았습니다."

"고맙소. 내가 이곳에 온 것도 군량미와 병선, 싸울 군사 때문이오."

이순신은 최대성이 모아준 군량미를 보성 회천면 군학마을에서 배에 싣고, 바다와 배를 잘 아는 어민들, 뱃사람들과 함께 바다로 나갔다.

해를 넘겨 1598년 4월이다. 보성 일대와 남해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최대성은 벌교포, 대포, 장암포, 영등포 등으로 들어오는 왜적들을 막았다.

그리고 6월이 되었다. 왜선이 또다시 예진에 정박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니 이미 득량의 오봉산을 지나 성적골까지 와 있었다. 최대성은 적의 뒤쪽에 진을 쳐 퇴로를 막고 아들 언립과 정회, 황원복을 선봉으로 적과 격전하였다. 마침내 왜적이 베틀굴이 있는 금화사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쏘아대는 화살과 조총 탄환이 비 오듯 했지만, 최대성은 선두로 나섰다. 그리고 오돗치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적장을 생포할 순간이었다.

그때다. 골짜기에 잠복한 복병의 유탄에 최대성은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죽은 뒤에도 당당하고 위엄어린 부릅뜬 눈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한다.

뒤따르던 아들 두 형제도 이곳에서 전사했다. 이로 인해 성적골이 군머리가 되었다.

베틀굴의 여 장수 경주 최씨가 여성들을 이끌었던 금화사도 '절에 워낙 빈대가 심하게 끓어 태워 버렸다.'는 전설과 주춧돌, 석불이 새겨진 암석만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베틀굴은 일제 강점기에 폭파되는 비운을 겪었다.

"최대성의 후손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그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최대성의 후손들은 고향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하지만 최대성 장군과 군머리, 베틀굴의 여 장수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니, 훌륭한 사람이 있어 땅이름도 빛나는 것이다.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