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31>마한의 정체성을 보여준 영암 옥야리 방대형(方臺形)고분下

입력 2018.10.23. 00:00
분구 중앙에 수혈계 횡구식 석실묘 단독 축조 등 특이
봉분 내부 구조만 놓고 보면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전통적인 영산강식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까닭은 영산지중해 입구에
위치한 영암 시종 지역이 남해포라는
국제 무역항을 중심으로
옥야리(왼쪽)와일본(오른쪽)원통형토기

지난 주말 영암과 나주에서는 각기 마한 축제를 열어 마한의 심장부라는 이 지역의 자부심을 드러내려 하였다. 특히 나주에서는 전라도 정도 1000년 기념식과 함께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영암에서는 영산지중해의 거점 항이었던 옥야리 방대형 고분이 있는 남해포 일대에게 치러졌다. 남해포에 있는 남해신사에서 해신에 대한 제의를 봉행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남해신사는 고려 유일의 해신사전으로 우리나라 해신 사전의 효시라 할 정도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필자도 영암 마한 축제의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할 기회를 얻었지만, 남해신사의 역사적 가치를 찾으려는 학술 세미나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였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의 관광 목적 가운데 중요한 이유가 역사 유적을 찾는 것이라는 최근의 설문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우리의 전통 문화를 올바로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지난 호에서 분구를 축조할 때 나무 기둥을 세워 석실 벽을 축조한 양식과 토괴를 이용하여 방사선상 및 동심원상으로 구획한 후에 성토를 하는 거미줄 형태의 분할 성토 방식이 영산강 유역에서 유독 옥야리 방대형 고분에서 보인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이처럼 토괴를 고분에 활용하는 방식은 풍부한 강수량과 잦은 태풍과 홍수 등 자연 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남부 지역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났을 것이라 생각된다. 여하튼 토괴를 방사상, 또는 동심원상으로 구획하여 성토를 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방사선상과 동심원상을 결합시켜 고분을 축조하는 방식은 보다 발전된 토괴 활용 방식이라 하겠다.

한편 옥야리 고분에서는 기존 영산강 유역의 다른 고분들에서 사용한 일반 성토재 대신 점성이 강한 재료를 분구 축조 과정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봉분의 구축 묘광 형태와 경사진 墓道部 등 봉분 구조를 보면, 영산강 유역보다는 오히려 창녕 교동 3호분과 대구 성하리 고분 등 가야나 신라 양식과 비슷하다. 또한 대부분 영산강 유역 고분들에서 3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목관묘, 옹관묘, 석축묘 등 다양한 묘제들이 지속적으로 조영되고 있는데 반해, 옥야리 방대형 고분과 복암리 인근 가흥리 신흥 고분만은 분구 중앙에 수혈계 횡구식 석실묘가 단독으로 축조되고 주변부에 옹관묘가 매장되는 양식을 보여주는 등 특이함이 나타나고 있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신흥 고분과 다른 면도 있다. 가령, 옥야리 고분에서는 목곽이 없는 구조였지만, 신흥리 고분은 목곽이 시설되어 있는 등 차이가 있다.

#그림1중앙#

이처럼 봉분 내부 구조만 놓고 보면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전통적인 영산강식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까닭은 영산지중해 입구에 위치한 영암 시종 지역이 남해포라는 국제 무역항을 중심으로 백제-서남해안-가야-왜를 연결하는 중요한 중간 거점 역할을 하는 곳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교역의 중심지에 위치한 탓으로 주변의 다양한 문화들이 남해포 일대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교류를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옥야리 방대형고분 출토유물 가운데, 영산강 토기의 전형을 형성한 유공광구소호도 왜의 스에키 계통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통형 고배는 아라가야가 위치한 함안 지역 고배와 관련이 깊고, 장경호와 세승문 단경호 또한 가야 계통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고분 축조 양식이 왜, 가야 양식과 비슷한 측면이 보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출토 유물 가운데 구연을 막은 단경호를 관외 부장하는 전통은 영산강 유역 옹관묘의 대표적인 특징에 속하고, 영산강식 토기의 전형인 조족문이 시문된 단경호와 횡치소성된 단경호도 부장품으로 함께 나온 것을 보면 전통적인 토착성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역시 출토 원통형 토기 또한 왜의 하니와와 형태상 유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저부가 있다는 점에서 기존 영산강 유역을 대표하는 호형 원통형 토기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고, 제작 기법도 토착 세력의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의견을 고려할 때 재지적(在地的)인 특징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나아가 옥야리 방대형 고분이 왜 가야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영산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석실분으로 조영된 형식을 받아들였지만 석실을 받아들인 후에도 옹관묘와 목관묘 등 전통 묘제가 같이 병행되고 있는 것도 토착적 전통을 견지하고 있다는 살필 수 있는 주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가야나 왜 등 외부 문화의 물적 증거들이 옥야리 고분 등 영산강 유역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토착적인 문화 요소들이 외부 문화에 의하여 완전히 대체되는 양상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한층 새롭게 발전된 상태로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영암 시종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산강 유역의 토착문화가 외부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 특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영산강 유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분구와 함께 조성된 횡구식 석실묘가 벽석을 쌓는 방식이 조잡하고 정형화되지 않은 양상을 보이고 있는 데, 이는 영산강 유역에서 거대 분구의 매장 주체부로 석실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가야나 왜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 특성을 지닌 거대 분구를 자체적으로 조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옥야리 방대형 고분과 같이 거대 고분을 조영한 시종 지역의 정치 세력들은 고유문화를 토대로 외래문화를 새롭게 녹여 영산지중해의 독자적인 정체성이 드러난 문화요소를 확립하는 역량을 지녔다. 말하자면 영산 지중해의 국제 무역항인 남해포를 통해 유입된 새로운 문화요소가 일찍이 비옥한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배후에 형성된 시종천 중심의 토착 문화와 결합하면서 이 지역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정체성이 확립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시종 지역에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것을 가지고 5세기에 들어 고대 영산강 유역의 주도권이 시종 지역에서 반남 지역으로 넘어가게 되자, 475년 고구려의 남진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는 대외적인 상황을 이용하여 주도권을 빼앗긴 시종 지역 세력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영산강 유역이 4세기 후반 백제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논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더욱이 이 주장은,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왔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시종천을 경계로 작은 연맹을 각기 형성하였던 시종과 반남 지역의 정치체들은 3세기 후반 시종 세력이 반남 지역으로 통합되면서 '내비리국'이라는 마한 남부 연맹의 대국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두 세력의 힘이 비슷하기 때문에 통합이 중앙집권 단계에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정치 세력들의 독자적 힘을 인정하는 느슨한 단계의 통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같은 연맹체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옥야리 고분이 석실분을 일찍이 받아들인 반면 신촌리 고분은 늦게까지 옹관고분을 고집하였던 까닭은 영산지중해의 입구에 위치한 시종의 옥야리 방대형고분 피장자가 새로운 문화 수용에 보다 개방적이었다면, 내륙에 위치한 반남 지역 신촌리 9호분 피장자는 토착적인 대형 옹관묘의 전통을 끝까지 고집하는 등 소극적이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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