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터)광주와 선동열

@무등일보 무등일보 입력 2018.10.19. 00:00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 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가수 김수희의 히트곡, '남행 열차'의 첫 소절이다. 남행열차의 떼창이 광주 북구 임동 공설운동장 야구장에 울려 퍼질 때 쯤이면 프로 야구 해태 타이거즈 승리가 얼추 굳어 졌다. 그리고 열차가 목포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목포의 눈물'이 나오면 경기는 해태 타이거즈 승리로 끝났다.

광주 항쟁의 시퍼런 기억이 사라지기 전인 80년대 공설 운동장 야구장은 유일하게 광주 사람이 모여 소리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광주 사람 10명만 모여도 최루탄이 쏟아지던 시절, 공인된 만남의 장소가 열악한 시멘트 바닥으로 된 야구장이었던 셈이다.

거기에는 광주의 자존심이자 상징인 빨간 유니폼의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늠름하게 서있었다. 맘 둘 곳 없는 우울한 회색빛 도시, 광주에 빨간 유니폼 사나이들은 거의 유일한 위안이자 피난처였다. 그들은 삼성이고 롯데고 닥치는 대로 때려 눕혔다. 그들의 멋진 활약은 언젠가는 군사 정부를 끝장 낼 수 있다는 희망과 맞닿아 있었다. 그들은 광주 시민의 염원을 담아 이겨야 했다. 그들은 광주가 갈수 없지만 가야할 길을 만드는 개척자 같은 존재였다.

그 중심에 언제나 선동렬 선수가 있었다. 선동렬은 엄혹했던 시절 볼 하나 하나에 영혼을 실어 야구 천하를 평정해나갔다. 그것도 완벽했다. 0점대 방어율의 그가 나오는 날이면 경기는 이미 정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코리안 시리즈도 따놓고 우승이니, 광주 사람들은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됐다.

선동렬이 광주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했다. 맨날 이기는 야구지만 경기가 끝날 때쯤 응원가는 으레 '목포의 눈물'이었다. 야구는 이겼지만 현실로 되돌아가야 하는 광주만의 설움이 묻어 있었지만. 이겨 놓고도 눈물로 끝내야 하는 80년대 페이소스. 그 자리에 선동렬이 늘 함께 했다.

사람들은 선동렬을 '국보'라 했다. 그러나 광주사람인 필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국보 보다는 '가보(家寶)'에 가깝다. 집에 감춰 두고 몰래 들춰보는 가보가 더 어울린다.

그런 '광주의 가보'가 국회 국정감사장에 섰던 모습에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병역 특례 선수를 잘못 뽑은 죄다. 국민 감정을 잘못 읽고 병역 특례자를 뽑은 그의 무신경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가 광주에 새긴 가보로서의 자존심은 지켜주고 싶다.

광주에서 선동렬이 주는 상징은 야구 이상이다. 엄혹한 시절, 선동렬과 동지적 결사로 묶인 광주 사람의 정서를 외지인들은 잘 모를 수 있다. "연봉이 얼마냐, 사퇴하라?"는 한 여성 국회의원의 호통에 광주 사람들 상당수가 당황스러워 했을 터다.

선수 시절에 비하면 선동렬의 감독 생활은 감동이 덜하다. 그래서 야구 선수로만 영원히 남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칼럼니스트 나윤수 nys8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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