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30>마한의 정체성을 보여준 영암 옥야리 방대형(方臺形)고분上

입력 2018.10.09. 00:00
‘내비리국’이라 불리는 마한의 대국 성립 사실 증명
옥야리 일대의 마한 대국이
거점 항구인 남해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개 무역에다
배후의 풍부한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영산지중해의 중심지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원통형 토기(옥야리 방대형 고분 출토)

영암군에는 내동리 고분군 (전라남도 기념물 83호), 옥야리 고분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40호), 신연리 고분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39호), 자라봉 고분 등 49개 군(群), 187기에 달하는 옹관묘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가히 '옹관묘의 고장'이라 일컬을 만하다. 특히 삼포천 수계에 속한 내동리·신연리·옥야리를 중심으로 무려 25개 群, 100여 기의 옹관묘가 모여 있는 시종면 지역은 고분의 크기나 숫자를 통해 적어도 4∼5세기에 걸쳐 마한의 대국 수준에 해당하는 정치체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말하자면 이 가운데 상촌 19기, 신산 5기, 서촌 1기, 장동 3기 등 여러 마을에 총 28기가 분포되어 있는 옥야리 지역 고분군을 항공사진으로 보면 마치 경주 대릉원에 온 느낌이다. 이와 같이 밀집된 무수히 많은 대형 고분들은 이곳이 과거 마한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필자가 살핀 바 있지만, 이 대형 고분들은 시종과 반남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 '내비리국'이라고 불리는 마한의 대국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가운데 옥야리 고분군에서 동남쪽으로 800여m 떨어진 남북 방향의 구릉 능선에 마을 사람들이 '동산'이라고 불렀던 방대형 고분이 있다. 분구 규모가 길이 30m, 너비 26.3m, 높이 3.3m의 대형 방대형 고분인 이른바 장동 1호분인데, 규모 뿐만 아니라 단독으로 존재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끌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두 차례에 거쳐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분구 중심부에서 석실묘 1기, 분구의 사면을 따라 석곽묘 1기, 옹관묘 4기, 목관묘 1기, 매납 유구 1기를 확인하였다. 매장 시설 및 주구 내부에서는 철갑편, 철부, 철도자 등의 금속류와 고배, 장경호, 유공광구소호 등의 토기류 등 186점의 중요 유물이 출토되었고, 주구 내부에서는 분구 정상부에 둘려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독특한 형태의 원통형 토기도 다량 출토되어 고대 장송 의례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2013년에 다시 세 번째 발굴 조사를 통해 고분의 축조 양식 기법까지 확인되었다.

#그림1중앙#

이 결과, 고분의 구조가 이른바 '영산강식 석실'의 원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옹관 일색의 영산강 유역의 고분 형태에 석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데 장동 고분이 그 시작을 알리고 있는 셈이었다. 말하자면 4세기 중엽에 조성된 장동 고분의 석실분이 5세기 중엽에 조성된 나주 다시면 가흥리 고분, 복암리 정촌 고분을 거쳐 '아파트형 고분'을 유명한 복암리 3호분의 석실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2018년 5월 8일자 본란, 20. 마한 남부 연맹의 '타임캡슐', '다시들' 복암리 고분군(中)) 그런데 이 석실분들 원래 모습이 백제보다는 왜 및 가야 계통과 관련된 것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말하자면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장동 고분에서 토괴(흙덩이)를 활용하여 정연하게 구획하여 고분을 축조한 지망상의 분할 성토 방식과 함께 독특한 특징을 가진 원통형 토기 등 주변과의 교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다수 나왔다. 이러한 특징들을 영산지중해의 거점 지역으로써의 옥야리 지역의 역사적 위치와 결합시키면 새로운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옥야리 고분군과 불과 1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삼포천 하류에 '남해포'라 불리는 유명한 포구가 있다. 이 포구는 1970년대까지도 목포에서 이곳을 종점으로 하여 여객선이 다녔고, 둑 건설 후에도 내수면 어업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할 정도로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거란의 침공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을 온 고려 현종 임금이 남해포의 해신을 위해 사당을 설치하였다는 전설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에 선박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남해당'의 제사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였다는 사실 등을 살필 때, 이곳이 고려·조선 훨씬 이전부터 해상 무역의 중심지를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영산강 입구에 위치한 '남해포'는 지리적 여건상 외래문화 유입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며, '다시들' 지역의 경제적 번성을 이끌었던 '회진포'와 더불어 마한 시기 시종, 반남 지역의 영광을 일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믿어진다.

20여 년 전 목포대 박물관이 이곳 '남해당' 터를 발굴했을 때 확인된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지금도 논밭 여기저기서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영산강과 삼포천을 사이에 두고 비옥한 충적 평야가 형성된 이곳은 가장 빨리 도작이 시작된 다시들 가흥리, 엄청난 벼껍질 압착층이 확인되고 있는 광주 신창동 유적과 더불어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였다. 따라서 옥야리 일대의 마한 대국이 거점 항구인 남해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개 무역에다 배후의 풍부한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영산지중해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모습을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어렴풋이나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이제껏 출토 유물을 통해 당시를 이해하려 하였던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4∼6세기의 한국과 일본의 고분 축조 기술을 비교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살피는 또 다른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창녕 교동,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 등 가야지역 고분에서는 확인되지만 영산강 유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분구를 축조할 때 나무 기둥을 세워 석실 벽을 축조한 양식과 역시 가야 지역에서 흔한 토괴(흙덩이)를 이용하여 방사선상 및 동심원상으로 구획한 후에 성토를 하는 지망(蜘網,거미줄) 형태의 분할성토 방식 등이 옥야리 방대형 고분에서는 확인되었다.

가야 고분 축조에서 주로 사용된 분할 성토 방식은 방대형 분구의 중심을 기준으로 회색 점토를 사용해 세로 방향으로 약 10등분하고, 가로 방향으로 2∼3개 정도 연결한 후 그 사이를 적색 사질 점토와 회색 점토를 엇갈려 쌓은 방식을 말하는 데 옥야리 고분처럼 한 변의 길이가 30m, 높이 4m가 넘는 큰 방대형 고분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거미줄 형태의 분할 성토(分割盛土)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토괴를 고분에 활용하는 방식은 풍부한 강수량과 잦은 태풍과 홍수 등 자연 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남부 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나타났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옥야리 방대형 고분 축조에서 나타난 분구 성토 방식은 기존의 영산강유역 분구 성토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영산강 유역 고분의 분구 성토는 신촌리 9호분, 복암리 3호분처럼 분구 외연에 단면 삼각형의 둑을 둘러쌓고 이 내부를 메워 나가는 방식으로 서일본 공법과 유사한 제방형 성토방식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기본적으로 토괴라는 구획재를 사용해 분구 평면을 구획하고 공간을 구분한 후에 성토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가야 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분할 성토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구획한 공간에 고분 주변에 도랑(周溝주구)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단단하게 결구하면서 쌓아 올리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 선진화된 기술이었다. 옥야리 고분의 분구 축조 시 분할 성토 등은 가야 양식을 채용한 것 같으나 세부적 성토 방식에서는 가야 지역과 다른 독자적인 특성을 띠고 있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외래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독자적인 문화로 녹여내고 있는 이 지역 문화의 특성을 알 수 있겠다.

그런데 분할 성토할 때 방사상 모양으로 구획을 하는 축조 방식은 영산강 유역의 나주 가흥리 신흥 고분과 나주 장동리 고분, 가야 지역의 창녕 교동 고분, 신라 지역의 대구 달성 성하리 고분 등에서는 많이 보이나, 백제 지역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일본의 고분들에서는 방사상 대신에 동심원 모양으로 구획을 하여 성토를 하고 있어 한반도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토괴 축조시기를 보면, 영산강 유역에서는 4세기∼5세기 중엽, 가야 지역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일본에서는 6세기 중엽∼후엽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영산강 유역에서 이러한 토괴 축조 기술이 먼저 발달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영암 옥야리 방대형고분에서는 방사상 구획선과 동심원상 구획선이 결합된 방식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옥야리 고분은 한반도와 왜의 두 지역의 특성이 함께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를테면 두 요소를 접목시켜 새로운 고분 축조 문화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옥야리 고분에서 나타난 새로운 토괴 축조 양식이 영산강 유역에서는 5세기 중엽, 가야 지역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일본에서는 6세기 중엽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조사된 토괴 축조 방법을 통해 남해포라는 국제 무역항을 둔 시종 지역이 가야·왜와의 교류 중심지로 기능하며 고유의 새로운 문화적 특질을 창조해내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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