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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43> 3·1만세운동의 최연소 독립투사 최현숙
시위행렬 맨 앞서 태극기 나눠주며 '대한독립 만세' 외쳐
입력시간 : 2018. 09.18. 00:00


학창시절의 최현숙 시민의 소리 제공
최현숙(1904~1984)의 어릴 적 이름은 최수향이다. 1904년 1월 27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당시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서 과수원을 하는 부유한 가정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또한 또래보다 성숙하였으며 사리분별에도 밝았다.

1914년 10살에 부모님을 설득하여 1908년 광주 최초로 문을 연 수피아여학교 보통과 4년을 마쳤다. 이어 수피아여학교 고등과에 진학하여 1920년 제6회 졸업생이 되었다.

수피아여학교 고등과 3학년 때인 1919년이다. 서울에서 시작한 3·1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광주에서도 3월 10일 봉기하기로 되어있었다. 최현숙을 비롯한 여학생들은 늦은 밤 수피아홀 기숙사 지하실에서 몰래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들며 시위준비를 했다.

최현숙 결혼사진 시민의 소리 제공


시위 당일 최현숙은 시위행렬의 맨 앞에 섰다. 오후 2시에 학교를 출발하여 광주시장까지 행진하면서 만들어온 태극기를 나눠주고,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곧장 일제 헌병에 의해 박애순, 진신애 선생 등과 제일 먼저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사 3·1여성동지회편에 있는 최현숙의 회고담이다.

'그때 당시에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불타는 마음으로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일경에게 체포되고 제일

먼저 잡혔다. 남들보다 키가 좀 컸던 것이 죄였지. 머리에 끈을 두르고 짚신을 신은 채 학교 앞에서 광주시장까지 만세를 부르는데 일본 경찰이 제일 먼저 잡아가더라.'

'체포되고 모두들 취조를 받게 됐어. 일경은 만세를 부르게 한 주동 인물이 누구냐? 라고 모두에게 물었다. 그때 나는 겁도 없이 주동자는 바로 나다! 라고 말하고 동료들과 선생님을 지키려 했지.'

'감방에 있을 때 면회도 안 되고 옷도 넣어주지 않아 옷을 갈아입을 수가 없어. 몸에 이가 생기면 밤마다 서로 이를 잡느라 법석을 떨던 일이 새삼 기억나.'

최현숙 독립투사 시민의 소리 제공


'여성들은 항상 자기 본분을 지킴으로써 자손에게 복을 주어야 해. 애국하는 일이 바로 그 길이지.'

그렇게 15세의 어린 나이에 최현숙은 미결수로 50여 일간 감옥에 갇혀 있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최현숙은 투옥 당시 일경에게 불려가 고문을 받던 중 머리에 15cm정도의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머리에 끈을 매고 지내야 했다.

그렇게 고문에 시달리다 풀려나온 뒤, 최현숙은 옥살이를 했다는 기록 때문에 걱정을 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아이고! 우리 막둥이가 늦게 나서 애지중지 키웠는데 참 장한 일을 했어.'하며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자랑을 했다 한다.

최현숙은 '나라를 잃은 것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으로 출옥한 뒤에도 1920년부터 광주 흥학관(동구 광산동 구시청)에서 야학을 지도하였고, 1921년에는 서울 정신여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중에도 방학을 이용, 광주 흥학관 야학을 지도하며 청소년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24년 최현숙은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광주로 내려왔다. 모교인 광주 수피아 여학교와 호남보통학교, 북문 밖 교회부속 유치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또 흥학관에서 본격적인 문맹퇴치운동과 주민계몽운동에 나섰다.

애국지사 동산의 최현숙 기념비


당시 여성야학의 모집대상은 10대부터 40대까지였다. 하지만 최현숙은 누구든지 찾아오면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이때 광주지역의 독립운동 및 문화운동의 요람이었던 흥학관의 중심인물로 김용환이 있었다.

최현숙은 김용환과 자주 만나며 3년여의 연애 끝에 1924년 8월 11일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 당시 25세였던 김용환에게는 14세의 동생 김용준이 있었다. 최현숙은 시동생 김용준의 뒷바라지에도 열성을 쏟아 그에게 항일독립정신을 길러주었다. 김용준은 광주고보에 다니면서 독서회 활동, 맹휴투쟁을 벌였다.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항일독립투사가 되었다.

당시 김용환은 동아일보 광주지국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장력과 필체가 뛰어났던 최현숙도 1928년부터 동아일보 광주지국 총무 겸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광주 최초의 여기자'이며 '부부언론인'이 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11남매가 태어났다. 최현숙은 넉넉지 못한 생활형편에 더욱 열심히 일했다.

최현숙의 3남 김양균의 어머니에 대한 회고다.

'어머니는 여성언론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민족지 보급,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상보도 등 아버지의 신간회 활동을 비롯해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

'우리 11남매를 키우기엔 가산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어머니는 여학교 선생과 여기자 그리고 전남인쇄소의 경영을 맡아 가정을 꾸려 나갔다.'

최현숙 흉상


'그렇게 힘들어도 어머니의 인자한 표정은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불만은 단 한 번도 표시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민족 모두가 염원했던 해방을 맞이했다. 최현숙은 원불교에 귀의하여 교화사업, 각종 불우사업, 청소년사업 등에 헌신하며 독립기념관건립 모금에 앞장서기도 했다. 1984년 7월 25일, 최현숙은 일제의 고문후유증인 지병이 악화되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4년 3남 김양균이 1919년 당시 재판 판결문을 발견하였고, 1986년 애국지사표창,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또 1988년, 문성고 정문 맞은편 제석산 자락에 '광주의 유관순'으로 불렸던 최현숙 독립비와 흉상이 건립되었다. 이제 그 '애국지사추모동산'에서 오가는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나라사랑의 정신과 역사를 되새기며 이어주고 있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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