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42>단심송의 여인 김정자

입력 2018.09.04. 00:00 최민석 기자
남편 독립운동 전념토록 살신성인 소나무에 목매 순절
전남 함평의 김철 기념관

김정자는 함평군 신광면 계천리 사천 마을에서 태어났다. 사천 마을은 영광군 군남면 금산에서 발원한 함평천이 신광면 동정제에 들렸다 나와서 만들어놓은 들녘 마을이다.

일찍이 이곳에 입향하여 일가를 이루고 사는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자는 어릴 적부터 착하고 영리한 아이로 마을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1915년 무렵이다. 혼기에 이른 김정자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신랑은 이웃 마을 신광면 함정리의 김철이었다.

함정리는 당시에 영광 땅이었다. 마을 뒤로 아홉 개의 봉우리가 아늑하게 감싸고 있어서 마을 이름이 구봉이었고, 김철 집안은 천석꾼 소리를 듣는 부자였다.

김철(1886~1934)은 아버지 영산 김씨 김동진과 어머니 전주 이씨의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영광군 묘량면의 외가에서 한학을 배웠다. 1908년 12살에 영광 광흥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했다. 이 광흥학교는 영광의 유학자인 조승찬과 편용무 등이 세운 향교 소속의 사학이었다. 또 이 광흥학교는 경술국치 뒤 한일합방 반대를 외치다,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다.

1912년 김철은 서울의 경성법률전수학교를 나와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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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족들과 논의하여 전답일부를 소작인들에게 나눠주고, 노비들에게도 살림밑천과 함께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해주었다.

1915년, 이 해에 김철은 아리따운 아내를 맞아 혼례를 치렀다. 이웃 마을 사천에서 시집을 왔기에 사천댁이라고 불리웠던 김정자다. 하지만 김정자의 신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일제의 감시와 회유, 협박에 시달리던 김철이 중국 상해로 망명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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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김철은 중국으로 떠나고 김정자는 시아주버니인 김영달 집에서 기거하였다.

김철이 중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일제 헌병들은 아내인 김정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집 주변에 헌병을 배치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서신검열에 나섰다.

그런가하면 한밤중에도 불쑥불쑥 찾아와 가족들을 심문하고 괴롭혔다.

1917년 김철은 상해에서 여운형(1886~1947)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에는 잠시 고향에 들려 자신의 전답을 파는 등 독립자금을 마련하고, 손병희(1861~1922)와 만나 3·1운동을 계획하였다. 또 대한독립임시사무소 설치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위원 및 교통총장대리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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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김철은 형인 김영달에게 편지를 보내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였다.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 한 몸을 기꺼이 조국에 바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

이렇게 김철이 아내에게 이혼의사를 밝히게 된 배경에는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 일제에 발각되어 주요 감시대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랄한 일제의 탄압을 우려하여 아내의 안전을 위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김철은 1920년에는 의용단 조직에 참여하였고, 독립자금 모금으로 인해 5년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고, 1924에는 상해대한교민단 학무위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을 맡았다.

이 해, 1924년에 김정자는 남편인 김철을 만나기 위해 상해로 갔다.

그러나 김철은 다시 아내에게 자신의 심정을 밝히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그러잖아도 1919년 삼일만세 이후로 일제의 탄압과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더욱 김정자의 미모에 관심을 가진 헌병들의 괴롭힘은 정도를 넘어섰다. 김철을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김정자에게 치근대며 추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김정자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불안한 생활을 하며 자신이 욕을 당하면 그것은 남편을 욕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혹여 남편이 자신을 보러 찾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히면 이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남편이 가족 걱정 없이 오로지 독립운동에 전념토록 하려면 내 목숨을 끊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상해에서 남편을 만나고 돌아온 김정자는 마침내 결심을 했다.

구봉마을 집 뒤에는 한 그루 독야청청한 소나무가 있었다. 1925년 어느 날, 김정자는 이 소나무에 목을 매 순절하였다. 이는 남편이 가족걱정을 벗어버리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이루길 기원하는 살신성인의 마음이요, 지아비에 대한 정조를 지키려는 당시 여인의 곧은 마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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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장례를 치른 뒤, 김정자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이 소나무를 '단심송'이라 불렀다.

그렇게 '순절 소나무'이고 '나라사랑 소나무'인 이 단심송 뒤쪽으로는 아홉 봉우리 구봉산이 마을을 품고 있다. 그리고 수령 250여년, 높이 13m, 둘레 1.5m의 단심송은 그 구봉산 위 하늘을 향해 활짝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한 마리 학의 모습이다.

그 뒤 김철은 독립운동에 함께 헌신하던 최혜순(1900~1975)과 재혼하였고 미경, 혜경 등 두 딸을 두었다. 1934년, 김철은 급성폐렴으로 갑자기 사망하여 중국 항주시 악비묘 뒤쪽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최혜순은 1937년 두 딸과 함께 귀국했으나 일제는 감옥에 가두었다. 형기를 마친 최혜순은 고향인 광주에서 살다가 1975년 사망하였다.

2003년 김철의 고향인 함평 합정리에 김철 기념관이 세워졌다. 안타깝게도 유해가 유실됐으나, 그의 유해터에서 가져온 한줌 흙과 함께 김정자, 최혜순 합장묘로 안장되었다. 그들의 안식처가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한 마리 학인 단심송 옆이니, 사후에라도 천년의 행복을 누리길 빌 뿐이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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