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41>소리를 남겨놓은 최초의 소리꾼 이화중선

입력 2018.08.21. 00:00
벌교장터 가설무대서 천재 꼬마명창으로 명성
이화중선

이화중선(1899~1943)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라는 실물을 남겨놓은 최초의 여성 소리꾼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가장 많은 음반을 남겼으며 또 '추월만정'이라는 음반은 수십만 장이 팔렸다고 한다.

이화중선의 어릴 적 이름은 이봉학이었다. 긴 수명을 가졌다는 봉황과 학처럼 귀하고 오래 살라는 이름이었을 게다.

이화중선의 출생에 관해서는 여러 말이 있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부산 동래의 '부곡' 출신이다. 부곡은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또 명창들의 사진을 찍었던 순천의 이영민은 '대구에서 나고, 전남 벌교에서 살았으며, 장재백에게 배웠다'고 했다.

호적에는 1899년 9월 16일 전남 목포시 남교동 12번지에서 아버지 이춘실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2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이중선, 이화성, 이화봉이 동생들이다. 이중선도 소리꾼으로 언니와 함께 부른 육자배기는 널리 알려진 음반이다. 이중선은 말년에 전북 부안에서 살았으며, 부안 매창공원에 묘소가 있다. 이화성도 판소리의 고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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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중선이 출생한 남교동에는 기녀들의 학습소인 목포 권번이 있었다. 이화중선의 아버지는 갓이나 망건 등을 고치며 떠돌아다녔고, 어머니는 권번에서 허드렛일을 했다고 한다.

이화중선이 다섯 살 때다. 전남 낙안군 벌교면 장좌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열세 살까지 살았다. 이곳 벌교의 장터에서 여도기라는 사람이 가설무대를 세웠는데, 이화중선은 노래를 불렀고 천재 꼬마명창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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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중선 네는 다시 남원으로 옮겼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이화중선이 열세 살에 남원의 동기(어린 기녀)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15세에 계례를 올리고 정식 기녀가 된 거로 추정된다. '조선창극사'는 이화중선이 남원 수지면 홈실(호곡리) 박씨(박해창) 문중으로 시집을 갔다가 1918년 19살 때에 협률사 공연을 보고 가출하여 소리꾼이 되었다고 했다.

이화중선은 최초의 판소리 수업을 남원의 권번에서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처음 소리를 가르쳐줬다고 알려진 사람은 장득주이다.

이화중선은 이 장득주에게 소리를 배우려고 장득주의 동생인 장득진에게 시집을 갔다고 한다. 장득주와 장득진은 순창군 적성면 운림리 사람으로 남원 수지면 장국리에서 살았다. 이들 형제는 조선조 말의 미남 명창 장재백의 조카이다. 또 장재백은 순창 사람으로 송흥록 사후에 남원 판소리를 이은 사람이다.

이화중선이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24살 때인 1923년이었다. 이 해 경복궁에서 개최된 판소리대회에서 이화중선은 '추월만정'을 불렀다. 그리고 그 때까지 최고 명창으로 인기를 구가하던 배설향을 제치고 단번에 우리나라 최고의 여성 판소리 창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추월만정'은 뜰에 가을 달빛이 가득하다는 뜻으로, '심청가'에서 황후가 된 심청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탄식하는 대목이다. 이 일로 '추월만정'은 이화중선의 최고 히트곡이 되었고, 등록상표와 같은 노래가 되었다. 임방울이 '쑥대머리'를 부르기 전까지 판소리사상 최고의 인기곡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화중선은 한양으로 갔다. 그리고 송만갑과 이동백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비로소 제대로 된 소리를 배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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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화중선이 이종원과 재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큰 인기를 모으자 동생인 이중선도 언니를 따라 판소리를 부르게 되었다.

이중선도 언니 못지않은 솜씨였으나, 하지만 언니의 그늘에 가려 크게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이화중선은 주로 '협률사'를 통해 활동하였다. 협률사란 전국 곳곳을 다니며 가설극장 공연을 하던 전통예술단체였다. 당시 판소리 공연은 김창환, 송만갑, 김채만 등의 협률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들 협률사 공연에서 이화중선의 인기는 대단했고, 가는 곳마다 돈을 가마니에 쓸어 담았다 한다.

명창 김소희도 어렸을 적에 이화중선을 따라 처음 협률사 무대에 섰고, 임방울도 함께 공연을 다녔다. 또 판소리 음반사에서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빅터판 '춘향전 전집'을 녹음했는데, 이화중선은 월매 역이었다.

이화중선은 천부적인 성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소리 역시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게 소리가 술술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또 이화중선은 격정적인 감정의 노래보다는 차분하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데 더 알맞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화중선과 이중선 자매가 부른 '육자배기'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며 눈물을 쏟게 했다고 한다.

1935년 줄타기 명인 임상문의 부친 임종원이 대동가극단을 조직하였다. 이 대동가극단에 이화중선이 참여하였는데, 이밖에도 남성 명창은 강남중, 임방울, 신영채 등이고, 여성 명창은 이중선, 박초선, 박초홍 등이었다. 이들은 판소리, 창극의 토막극, 남도민요, 줄타기 등의 종목을 공연하며 연중 가설무대로 전국을 순회하였다. 이때에 이화중선은 이도령, 이중선이 춘향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었다.

1943년 대동가극단의 두 번째 도일공연이 있었다. 일본의 레코드 회사에서 임방울과 이화중선의 음반취입을 하게 된 것과 일본 각지의 군수품공장과 탄광에 징용된 한국인 노무자의 위문을 겸한 공연이었다.

이들이 큐슈의 노무라, 야하다에서 공연을 마치고 오사카로 가려고 연락선을 탔을 때다. 그런데 위문대라지만 허울 좋은 이름일 뿐, 이들에 대한 보수는 없었고 다만 여비와 숙식비 정도가 지불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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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중선은 오랜 신병을 앓았는데 겹치는 피로와 영양부족으로 병세가 날로 악화되었다. 당시 일행인 임방울과 안영환의 말에 의하면, 이화중선은 병에 시달리며 비탄에 잠겨 늘 '죽고 싶다'고 하였다 한다.

그날 배가 일본의 다도해라는 '새도나이카'를 지날 무렵이다. 연락선 2등실에 누워있던 이화중선은 아무도 모르게 갑판으로 올라가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44세였으니, 이제 남아있는 건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했던 하늘이 내려준 그녀의 빼어난 소리와 이름뿐이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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