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27>마한의 용맹한 표상(表象), '鷹準(응준)'中

입력 2018.08.14. 00:00
외세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이고 강건한 전통 유지
백제금동대향로

고3 EBS 한국사 교재에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을 복속하였다는 문항이 다수 출제되어 있다.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논란이 있는 주제는 출제를 하지 않는 것이 기본 상식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출제진들이 이러한 논란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능시험이든, 공무원 시험이든, 국가가 주관한 시험에서 평가 문항으로 제작되어 버리면, 수 년 동안 학생들이 그것을 공부하게 되고, 객관성 여부를 떠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6세기 중엽까지 독자적 마한 연맹체가 유지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기존 관념을 극복하기 위한 장애가 적지 않음을 새삼 인식한다.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복암리 1호분 출토 녹유탁잔은 백제 영역에서 출토된 사례가 아홉에 불과할 정도로 희소한 토기라고 한다. 녹유는 당시 아직 중국의 청자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것으로, 현재 녹유 제작과 관련된 단서가 발견된 곳은 부여 쌍북리요지와 동남리요지 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녹유 그릇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최상위층 등의 제한적 수요를 위하여 소량으로만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중한 녹유제품을 傳世하지 않고 부장품으로 사용한 사례는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경우가 유일하다. 거기다 전실 앞의 제사 행위에 직접 사용된 토기를 깨뜨려 함께 부장해버리는 행위 또한 거의 유일한 사례로 死者의 배타적 소유를 염원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1호분의 피장자의 지위가 절대적인 존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복암리 1호분 출토 녹유 탁잔은, 녹유를 시유한 유개잔과 잔받침이 한 조를 이루고 있는데, 잔 뚜껑은 녹유가 많이 벗겨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잔 받침의 내면에는 1줄, 외면에는 2줄의 횡침선이 돌려져 있고, 바닥 외면에 2자(字)의 묵서 명문이 있다. 녹유의 박리가 심하여 분명하지는 않지만 윗 글자는 '鷹'으로 추정되고, 아래 글자는 '人'변이 확인되고 있다. '鷹'자를 기준으로 살필 때, 기왕에 백제의 별칭이라고 이해된 '응준'의 '鷹'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최초 발굴 조사팀에서 살폈지만, 필자 또한 동감이다. 말하자면 복암리 1호분 피장자가 백제의 별칭이었다는 '응준'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갖는 의미는 대단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응준(鷹準)은 '매'와 '새매' 즉, 매의 총칭으로 사용되며, '용맹한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를 보는 순간 필자는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전에 "마한의 사람됨은 몹시 씩씩하고 용맹스러웠다"라고 한 기록이 떠올랐다. 말하자면 당시 마한인들은 '응준'처럼 용맹스러웠고, 그것이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역사적 사실로 남아 후세에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진서 사이전에도 "(마한 사람들은) 성질은 몹시 용맹스럽고 사납다"고 하여 마한인들의 용맹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역시 같은 사이전 기록에 "나라 안에 役事가 있으면, 나이가 젊고 힘 있는 자들은 모두 등가죽을 큰 노끈으로 꿰어서 지팡이에 그 노끈을 매어 내두르게 하면서 종일토록 소리를 지르고 일을 하지만 조금도 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활과 방패와 창을 잘 쓸 줄 안다"고 되어 있다. 이렇듯 마한 사람들의 용맹함을 중국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마한인들이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이고 강건한 전통을 지녔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림1중앙#

진서 사이전 마한 조에 "풍속은 기강이 적고, 꿇어앉고 절하는 예법이 없다"거나,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라고 하여 마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 또한 마한이 중화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 연맹체를 유지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울러 마한 남부 연맹과 대립을 하였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일련의 이러한 중국측 기록들은 마한의 강성함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것임에 분명하고, 매의 의미를 지닌 '응준'이라는 명문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곧, '응준'이라는 칭호가 복암리 1호분 피장자에게 붙여진 것으로 볼 때, 그가 마한 연맹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서술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후왕(백제 성왕을 지칭함) 혹은 남부여라고 부르거나 혹은 응준으로 부르며 신라와 싸웠다(後王或號南扶餘 或稱鷹準與羅鬪)"라고 한 기록이 관심을 끈다. 이를, 전주 우석대 조법종 교수는 "백제의 별칭으로 '남부여', '응준', '라투'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羅鬪'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신라와 싸웠다'는 동사로 살피는 것이 옳다. 분명한 것은, 성왕 때 백제를 '남부여', 또는 '응준'으로 불렀다고 하는 사실을 제왕운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백제 성왕이 동왕 16년에 사비로 천도하면서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에 나와 있고, 교과서에도 서술되어 있어 잘 알고 있다. 이처럼 백제가 '남부여'라고 국명을 바꾼 것은 백제 왕실이 부여족을 계승하였다고 하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475년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부여계 백제 왕실은, 494년 북부여가 고구려에 복속되자 그들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응준'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응준이라는 명칭이 제왕운기에 '혹 남부여, 혹 응준'이라고 한 것을 보면, 남부여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조법종 교수는 응준이라는 명칭이 '매'를 뜻하기 때문에, 신라를 닭을 뜻하는 '계림', 고구려를 늑대를 뜻하는 '맥·예맥'이라 칭하듯이 백제는 매를 뜻하는 '응준'을 별호라 사용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살폈다. 이러한 해석은 그럴듯하나 필자는 의견을 달리하고 싶다. 백제는 국왕들이 사슴 사냥을 즐겨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슴을 주된 희생(犧牲)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 우연히 출토된 유명한 백제 금동대향로의 맨 윗 봉우리에 있는 사슴을 사냥하는 모습 또한 이러한 사실의 구체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부여계를 대변하는 동물은 '매'가 아니라 '사슴'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하여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관련하여 매를 신의 화신 또는 최초 샤만의 조상 등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마한 지역에 유포되었다는 견해는 시사적이다.

우리 민족의 원류에 해당하는 예맥족의 새, 사슴에 대한 신앙이 지역으로 분화되어 갔는데, 부여·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는 사슴과 관련 언급이 빈출되고 있다고 한다. 백제가 사슴을 희생으로 삼고 '부여' 명칭이 사슴을 나타내는 퉁구스어인 'buyu'와 같다는 점은 백제가 부여계통이 주류였다는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 신라나 마한 남부 연맹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진한·계림-닭, 마한-매 등 새와 관계있는 언급이 빈출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매'는 백제 계통이 아닌 마한 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결국 용맹함을 상징하는 '매'가 국호까지 '남부여'로 바꾸며 부여족 계승 의식을 강조하였던 백제의 상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매'가 백제의 별호라는 인식은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매'는 백제 아닌 또 다른 집단을 대변하는 상징동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응준의 실체를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삼국유사의 황룡사 9층 목탑 건탑 설화에 나와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유명한 건축가인 아비지가 설계한 동양 최대의 목탑이었으나, 고려후기 몽고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현재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탑은 불보사찰로 유명한 양산통도사를 세우고 계율종을 열었던 자장대사가 선덕여왕에게 건의를 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자장의 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아홉 나라를 진압할 수 있다고 신령이 개시를 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1층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5층 응류(鷹遊) 6층 말갈 7층 丹國(란국-거란) 8층 女狄(여적) 9층 예맥 등 당시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으나, 선덕여왕 당시 신라에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던 고구려, 백제의 이름이 없어 의아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9층의 예맥이 고구려라고 하면 나머지 5층의 응류가 백제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곧 응류가 응준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응준이 백제의 별칭이라는 인식이 선덕여왕 때인 7세기 전반까지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응준은 사슴을 상징으로 하며 '남부여'로 국호를 고치었던 부여계통의 백제 왕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매'를 상징으로 생각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갔던 세력, 곧 마한 남부 연맹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다음 호에서 자세히 살피겠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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