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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39>삭녕 최씨 부인의 솔씨 서말
변산 소나무 씨앗 서말 갖고 출가, 자손 대대로 길러내
입력시간 : 2018. 07.24. 00:00


진천 송씨 제각의 용솔
삭녕(朔寧) 최씨 부인은 남원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최항의 6대손인 최상중(1551~1604)이다. 왜란 당시 권율 장군 막하에서 군량미 책임자인 운량장(運量將)을 지냈던 최상중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이들 6남매는 모두 문재가 뛰어났다.

조선 시대 미증유의 환란이었던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7년 전쟁 왜란이 지난 뒤다. 전쟁 중에 남원성이 함락되고 온 시가지가 불타버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터였지만, 최상중의 집에도 다시 봄이 찾아왔다. 어느 날이다. 최상중은 딸 셋을 불러 글을 짓게 하였다. 그중 둘째딸의 글이 제일 맘에 들었다.

"그래, 상으로 무얼 받고 싶으냐?"

"아버님이 아끼시는 벼루를 갖고 싶습니다."

둘째 딸은 중국에서 수입한 최상품의 벼루를 갖겠다고 했다. 두 번째로 큰 딸에게 물었다.

"너는 무얼 갖고 싶으냐?"

"저는 엽전 1말을 받고 싶습니다."

삭녕 최씨와 부군 송흥시 합장묘


큰딸은 돈을 달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막내딸에게 물었다.

"너는 무얼 받으려느냐?"

"저는 변산 솔씨 서말을 받고 싶습니다."

막내딸은 서슴없이 변산 솔씨 서말을 달라고 했다.

당시 변산의 소나무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황장목이었다. 황장목은 전선을 만들거나 궁궐을 짓는 귀한 소나무였다.

이날 상으로 벼루를 받은 둘째 딸은 대사헌을 지낸 노진(1518~1578)의 손자며느리로 이후 가문이 더욱 번성하였다. 이때 상으로 받은 벼루는 가보가 되어 노진을 모신 남원의 창주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엽전 1말을 원한 큰 딸은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의 경주 김씨 집안 며느리로, 이 큰 딸의 후손들 중에는 큰 부자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변산 솔씨 서말을 원했던 셋째 딸은 익산의 진천 송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부군은 단성 현감을 지낸 송흥시(1586~1649)이다.

이 송흥시의 아버지는 표주박 늙은이라는 호를 가진 표옹(瓢翁) 송영구(1556~1620)이다. 이 표옹에 대한 일화가 여럿이다.

익산의 망모당


표옹이 37세이던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이다. 표옹은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다. 어느 날이다. 조선 사신들의 숙소 부엌에서 한 젊은이가 장작불을 지피며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을 줄줄 외우고 있었다. 표옹이 깜짝 놀라 젊은이에게 사연을 물었다.

젊은이는 자신은 남월지방 출신으로 과거를 보려고 북경에 왔으나,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였고, 돈도 떨어져서 여관에서 심부름꾼 일을 하고 있다 했다.

이에 표옹은 젊은이에게 과거시험 답안지 작성법을 가르쳐주고, 자신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서적의 필사본과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2년 뒤인 1595년에 젊은이는 과거에 수석 합격하였는데, 바로 명나라 대문장가로 알려진 주지번이다.

이 주지번이 1606년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왔다. 공식 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선조가 직접 교외까지 나가 주지번을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익산의 망모당


사절단의 임무를 마치고 주지번은 표옹을 찾았다. 그리고 표옹의 고향인 익산의 왕궁면까지 내려왔다, 자신이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주지번은 표옹에게 두 가지가 선물을 남겼다. 하나는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편액이고, 또 하나는 표옹의 사후지지를 택지해 주었다.

표옹의 또 다른 일화는 1611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돌아올 때의 일이다. 표옹이 낙동강을 건너기 위해 상주의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다.

감사인 표옹을 배웅하기 위해 나루터까지 따라온 이방이 '어르신네가 경상도에 계셨다가 가지고 가는 것은 손에 쥐고 있는 부채 밖에 없군요.'하였다.

이에 표옹은 그 말을 듣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낙동강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표옹이 가지고 있던 부채마저 강물에 던졌다고 해서 사람들은 낙동강을 투선강(投扇江)이라 불렀다. 또 그 부채를 던진 상주의 나루터를 투선진(投扇津)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시아버지였으니, 변산 솔씨 서말을 가지고 시집을 온 삭녕 최씨 부인이 얼마나 귀염을 받았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삭녕 최씨 묘 앞의 삼정승 소나무


송씨 일가는 삭녕 최씨가 친정에서 가져온 솔 씨 1말을 인근 산야에 널리 심었다. 그리고 후손들은 종중 내에 송금유사(松禁有司)라는 직책을 두고 삭녕 최씨 할머니의 소나무를 관리하고 지키는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인 태평양 전쟁 말기에 배를 만들기 위해 베어내고, 비행기 기름으로 쓴다고 송진을 채취하는 바람에 1만여 그루에 이르는 소나무가 사라져버렸다. 또 호남고속도로 건설로 종중 땅이 편입 되고,왕궁저수지 축조로 수몰되면서 상당수의 나무들이 더 희생됐다.

그럼에도 4백여 년의 세월 속에서 40여만 평의 울창한 소나무 숲도 대대손손 종자를 퍼뜨려 새 숲을 이루며 삭녕 최씨의 뜻을 이어오고 있다.

삭녕 최씨가 세운 또 하나의 전통이 진천 송씨 집안에 내려온다. 바로 '백 명의 자식 떡'이라는 '백자편'이다. 사람 발뒤꿈치 모양으로 만든 흰떡 수십 개를 부챗살처럼 둥그렇게 놓고 그 위에 다시 계속해서 얹어놓는다. 마치 피라미드처럼 6∼7층을 겹쳐서 쌓는다. 그리고 행사가 끝나면 이 떡을 하나씩 먹으면서 자손의 창성을 기원했다.

솔씨 은덕일까? 삭녕 최씨는 부군인 송흥시와 사이에 송유전, 송유경, 송유광, 송유식 등의 아들을 두고 장수하며 솔씨처럼 많은 후손을 남겼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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