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화가 최북(1712~1760)은 어느날 산수화를 제작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물 없이 산만 그렸다.
그림을 의뢰한 사람이 이를 따지자 붓을 내던지며 "아, 종이 밖이 다 물이로다"라고 일갈했다.
또 언젠가는 서평군 이요(1687~1756)와 내기 바둑을 뒀는데, 최북이 승기를 잡자 서평군이 한 수 물러 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에도 최북은 단호했다. 그는 바둑돌을 흩어버린 뒤 "바둑은 본래 즐기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꾸 수를 물러 주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나도 한 판도 둘 수 없을 것이오"라고 쏘아 붙였다.
조선 후기 문인 홍길주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출신이 천한 수학자 김영(1749~1815)의 불우한 삶을 '김영전(金泳傳)에 남겼다.
김영은 천문학과 수학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만, 기상 업무를 담당한 관청인 관상감에 들어갈 때마다 동료들의 질시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발탁한 정조가 승하하자 파직됐지만 순조 대에 혜성이 잇따라 나타나자 다시 관상감에 올랐다.
하지만 김영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홍길주는 "관상감 사람들이 그를 질시해 떼를 지어 몰려가 김영을 구타하고 상투를 잡아끌기도 했다"고 한탄했다.
이 책은 김영을 포함해 조선시대 다양한 인물 33명에 대한 전기를 모은 책이다.
조선 문인들이 기록한 '전(傳)' 가운데 교훈과 흥미를 주는 글을 뽑아 주제별로 엮어 눈길을 끈다.
전은 본래 인물의 선행과 미덕을 담는 문체로, 당대의 이념과 규범을 충실히 지킨 인물이 주된 대상이었다.
하지만 후대로 내려올수록 사회가 분화하고 삶의 양상이 복잡해지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출현하게 됐다.
이 책에는 충신, 효자와 같은 전기류의 전형적인 인물부터 기인, 협객, 과학자,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문인들이 주목하고 글로 남긴 33인의 삶이 수록됐다.
1부에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을, 2부에는 여성을, 3부에는 방외인으로 살았던 인물을, 4부에는 포로와 이주민 등 경계인으로 살았던 인물을, 5부에는 예술, 6부에는 과학, 수학, 의술 등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의 전기를 실었다.
마지막 7부에는 자신의 삶을 기록한 자전(自傳)을 소개했다.
한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문인의 논찬과 저자의 평설을 통해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다채로운 모습과 그를 바라보는 당대 혹은 후대인의 시선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책에 나온 33명 중 충신, 효자처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도 있지만 여성·예술가·중인이 더 많다.
또 조선후기 문신인 정칙, 양진영, 이장찬, 김창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쓴 자전 네 편도 함께 소개돼 주목된다.
전을 번역하고 해설을 덧붙인 안세현 강원대 교수는 "전은 작가와 대상 인물이 시대를 초월해 교감한다는 점에서 작가 의식이 반영된 문학이다"며 "과거에 있었던 남의 이야기일 뿐이라 여기지 말고 전을 읽으며 지금의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옥경기자 uglykid7@hanmail.net
- 시와 그림으로 피어난 꽃의 절규와 함성 시는 시인의 얼굴이자 내면이다.시인은 시를 통해 속내를 털어놓고 표정에 담지 못한 언어를 끄집어낸다.박노식 시인의 시도 이와 다르지 않다.박노식 시인이 최근 신작시집을 낸 데 이어 올봄을 넘기지 않고 시화집을 내놓았다.그의 첫 시화집 '기다림은 쓴 약처럼 입술을 깨무는 일'(달아실 刊)을 펴냈다.박노식 시인은 등단 후 9년 동안 5권의 시집을 냈고, 이번에 첫 시화집을 내는 것이니 부지런히 시를 쓴 셈이다. 그 원동력이 어디에 있냐고 묻자, "세상과 싸우기 위해, 밥벌이를 위해 삼십여 년을 접어두어야 했던 만큼 '시'를 미치도록 그리워했다"며 "남보다 늦은 나이에 꿈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 만큼 더 치열하게 시 창작에 몰두하였다"라고 답했다.시화집 '기다림은 쓴 약처럼 입술을 깨무는 일'에는 모두 37편의 시가 실렸는데, 각 편마다 꽃말을 제목으로 하고 부제로 꽃 이름을 달았다. 각 시편마다 서양화가 김상연의 그림이 곁들여져 있어, 꽃시(詩)와 꽃말과 꽃그림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시화집이라고 할 수 있다.가령 "자기애"라는 꽃말을 지닌 "수선화"를 시인은 이렇게 시로 적고 있다."마주 앉아서 그대의 말끝을 따라갈 때면 어느새 저녁이 오고 나의 눈빛은 강 하구에 이릅니다/가만히 보면 그대 얼굴이 우물 같아서 달이 뜨고 거기에 내 얼굴도 떠 있습니다/그대는 흰 꽃잎으로 나는 노란 꽃잎으로 다시 태어나서 우리는 지금 서로의 운명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자기애-수선화' 전문)"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는 꽃말을 지닌 "미선나무꽃"은 또 이렇게 시로 풀어냈다."아득한 기억처럼 슬퍼지는 시간들이 있지요/ 폭발 직전의 꽃망울은 순수의 가지에 놓여서 눈을 감아요/ 지난 노래를 부르지 말아요/ 한 장 꽃잎이 강물에 떠내려간들 누가 울어주나요/ 눈물은 온몸에 있어요/ 온몸이 울어요/ 당신이 다시 돌아와 내 눈물의 노래가 되었어요('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미선나무꽃' 전문)독자들은 시화집을 통해 37개의 꽃과 꽃말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꽃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이야기를 꽃에 투영한 결과이며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되면서 꽃말로 굳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시인이 이번 시화집의 부제를 '꽃말을 시로 읊은 가슴 저민 자화상'으로 명명했다. 시인이 정작 쓰고 싶었던 것은 꽃이 아니라 꽃 너머, 꽃말이 아니라 꽃말 너머,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 셈이다.박노식 시인은 이번 시화집 출간에 맞춰 '꽃말시'를 화가 김상연이 그림으로 표현해 낸 특별한 시화전을 연다.시화전은 광주시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에서 5월2~14일까지 박노식 시인의 첫 시화집 '기다림은 쓴 약처럼 입술을 깨무는 일' 출판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마련됐다.전시회 첫날인 5월 2일 오후 6시 오프닝과 출판기념회를 함께할 예정이다.김상연 화가는 "기존의 시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 화가의 눈으로 시를 재해석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며 "시화집에 인쇄된 그림과 원화가 주는 느낌은 또 다른 것이니 전시회에 오셔서 직접 감상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박노식 시인은 "'꽃말시'는 처음부터 시화집을 목적으로 구상했었다. 시집 한 권 분량의 60여 편을 염두에 두었으나 시화집으로 묶기에는 다소 벅찰 것이라며 그가 말렸다. 그래서 37편에 머물렀으나 꽃만 남고 훗날 그는 구름이 되어버렸다"며 "더는 가슴 저미는 일이 없길 바라므로 나는 죽은 사람처럼 이 시화집을 열어보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시인은 차마 더 이상 열어보지 못하겠다고 하니 시화집을 열어 꽃말시를 읽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박노식 시인은 광주에서 태어나 조선대 국문과를 나와 지난 2015년 '유심'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다. 그동안 시집 '고개 숙인 모든 것' '시인은 외톨이처럼' '마음 밖의 풍경'을 펴냈으며, 화순 한천면 오지에서 시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현재 광주 동구 '시인 문병란의 집'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김상연 화가는 화순에서 태어나 전남대와 중국 미술대학원을 거쳐 현대미술을 특유의 기법으로 회화와 설치, 미디어, 판화 등 다양한 장르로 표현, 주목을 받고 있다.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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