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에세이-앵무새의 혀

@무등일보 무등일보 입력 2018.07.19. 00:00

박성용 KBS광주방송총국 PD

입양해온 강아지들의 혀를 처음엔 감당하기 쉽지 않다. 손가락, 팔뚝 같은 피부 뿐 만 아니라, 바깥 냄새 물씬한 바짓단과 땀내 절은 양말, 가방을 핥고 맛본다. 혹은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녀석들의 얇고 까끌까끌한 혀로 목덜미를 핥는다. 이 때는 양말이나 가방을 핥을 때와는 다른 친근감의 표시인데 심히 저어했던 그 이물스러움도 몇 달 지나자 자연스러워졌다. 지금은 일부러 손바닥을 핥게 하고, 학교에서 돌아온 고3 아들은 녀석들이 입술까지 핥게 놔둔다. 그러면서 달라진 것은 또 하나 있다. 언제부턴가 녀석들의 똥오줌 냄새가 더 이상 불쾌하지 않은 것이다.

오래전 평론가 故김현이 편집한 '앵무새의 혀'라는 시집을 샀다. 표제시는 김명수의 시 였다.

앵무새 무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 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처음엔 별 감흥 없이 넘겼으나 시간이 지난 후에 자꾸 떠오르게 되는 시 중 하나가 됐다.

다른 생명체에 대한 연민도 호기심도 아닌 그 어떤 무엇이 남는다.

진화학에 따르면 사람의 손가락들이 물고기의 지느러미로부터 나왔다는 학설이 유력한데 최근엔 혹스유전자 조작을 통해 물고기(제브라피시)의 지느러미 날 자리에 사람 손가락 모양으로 발생했다는 실험결과를 봤다. 비단 그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사람과 물고기와 앵무새와 강아지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고 그런 믿음이 삶과 존재의 신성함을 침해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덧붙여서 앵무새가 됐든 강아지가 됐든 설사 계통상 뿌리가 다르더라도 세상엔 우리만 존재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인문학적 사회학적 관점은 그 겸손함에서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제발, 모르는 것에 대해 일단 침묵하기. 그리고 지적 호기심과 연민으로 대상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다가서기.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

한 TV프로그램에서 어느 배우가 과거 영화 속에서의 '바보 연기'를 다시 재연하면서 왁자지껄한 웃음을 유도하는 장면이 방송돼 논란이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 몰입하며 연기를 했을 그 배우가 누군가 요청해서 별 생각 없이 '바보 연기'를 했다는 것 자체는 딱히 탓하고 싶진 않다. 다만 그것이 웃음 코드 이외에 비정한 타자의 시선과 지적장애인에 대한 조롱이 녹아있는 편집이라는 걸 제작진들이 몰랐다는 것이 유감이다. 뿐 만 아니다. 여전히 개그의 소재로 '외모'와 '노인'이 단골인 이 땅은 편견과 '왕따'의 왕국이다. 거침없이 편견을 조장하는 그 개그들과 그들의 혀로 인해 가슴을 베일 사람들을 생각하니 또 그렇다.

언젠가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려달라는 아파트 경비아저씨에게 '야 너는 늙어서 얼마나 할 일 없으면 이거 하고 있냐'며 희롱하던 30대 남자의 혀. 장애인 재활 치료실을 열기 위해 돌아다녔던 후배에게 '알만한 양반이 왜 모르냐'며 비아냥거렸던 건물주들의 혀. 그런 혀들이 강아지와 앵무새 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 혀들. 극단적인 주장만으로 대립하는 예멘 난민 논란이 그렇고, 비판이 아닌 노골적 인신공격에 시달리는 박유하 교수가 그렇고, 마음 아프지만 전라도 사람들을 향한 노골적 편견이 또 그렇다. 재밌는 것은 당하는 쪽이 항상 정해져 있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일요일 마다 일하는 농장에서 발목 뒤가 다쳤다. 워낙 무신경한 타입이라 피부가 까진 줄도 몰랐지만 심하지 않아 곧 아물 것 같았다. 그런데, 어젯밤에 잠이 들 무렵 어릴 적 '아까징끼' 발라 주던 할머니의 손길이 느껴졌다. 발목을 보니 강아지가 내 발목의 상처를 정성스럽게 핥고 있었다.

문득 앵무새의 혀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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