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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38>이난영, 그녀의 노래는 뜨거운 눈물이요 불타는 사랑
노래에 천부적 소질… 이름만으로도 만인의 가슴 울려
입력시간 : 2018. 07.10. 00:00


이난영
이난영(1916~1965)은 그 이름만으로도 만인의 가슴을 울리는 가수였다.

이난영은 1916년 6월 6일 목포 죽교동에서 날품을 파는 아버지 이남순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옥례(李玉禮)인데 학교 기록에는 이옥순으로 되어있다.

1923년 이난영은 목포 공립여자보통학교(여성교육을 위해 별도로 설립되었다가 화재로 인해 목포북초등학교와 통합)에 입학하였는데,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고 어머니는 10살 때 가출하였다. 그 때문에 4학년 때 중퇴하여 오빠와 함께 솜공장에서 일도 하였다. 여섯 살 위 오빠인 이봉룡이 이난영이 열두 살 때 엄마가 있는 제주도로 보냈다. 이때의 자퇴서가 학교에 남아있는데, 보호자란에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고 도장은 오빠의 것이라 한다. 자퇴사유는 거주지 이전으로 되어 있다.

당시 이난영은 1학년과 3학년 때 각각 한차례 휴학을 했고, 성적은 10점 만점에 보통 6점, 7점이었으나, 유일하게 '창가' 과목은 9점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창가는 지금의 음악과목으로 바로 노래에 소질이 뛰어났던 것이다.

이난영 생가 터


제주도로 간 이난영은 극장을 경영하는 일본인 집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애를 보면서 부르는 이난영의 노래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안 일본인이 제주도로 순회공연을 온 태양극단에 추천해서 이난영은 막간가수로 출연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열여섯 살의 이난영은 극단의 정식 멤버가 되었고, 무대가수로서 출발하였다.

그 뒤 이난영은 오케이 레코드사의 이철 사장과 만남으로 성공의 길을 걷게되었다. 태양극단이 일본 대판으로 공연을 갔는데, 이때 이철 사장 역시 레코드 기획을 위해 그곳에 있다가 이난영을 만난 것이다.

이난영은 오케이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되었고 1933년 '향수', '불사조', 1934년에는 '봄맞이'를 불러 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1935년이다. 이난영은 조선일보 애향가 가사모집에서 1등에 뽑힌 목포출신 문일석의 '목포의 눈물(노래)'을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가요계의 새별로 등장하였다. 목포와 관련된 노래를 목포의 작사가가 노랫말을 짓고, 목포출신 가수가 노래를 불러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1937년 11월 21살의 이난영은 평양숭실전문을 나온 김해송(1911~?)과 결혼했다.

남편인 김해송도 가수이자 작곡자였다. 지금의 뮤지컬의 개념을 처음 시도한 인물로 당시에 천재라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었다. 이난영은 오케이레코드 이철 사장의 소개로 김해송을 만났는데, 2년 정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유달산 자락


1939년 이난영은 남편인 김해송이 작곡한 '다방의 푸른 꿈'을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이 국내 최초 블루스 곡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해조곡', '달없는 항로', 오빠인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다' 등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명실공이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가 되었다. 또 '오까 랑꼬(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1940년 이난영은 단순히 노래하는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극단에서 연기와 노래를 함께 하는 탤런트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는 뮤지컬을 중요시했던 남편 김해송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오빠인 이봉룡도 김해송에게 악기 연주와 화성법을 배워서 작곡자로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12월 이난영은 남편 김해송과 함께 뮤지컬 전문 쇼단 KPK악극단을 창단하였다. 하지만 1950년 6·25가 발발하고 불행하게도 김해송은 납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김해송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그렇게 이난영을 이별의 여인으로 만든 전쟁이 지나가고 이난영은 KPK악단을 혼자 운영하였다.

이 시기에 이난영은 다른 연예인과 염문이 있었다. 당시 남편을 잃고 외로워하던 이난영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은 당대 최고의 남자 가수로 알려진 남인수였다. 그런데 그들의 인간관계에 악연이 얽혀있다.

납북되기 전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염문을 뿌린 여자가 있었다. 후배 연예인인 '김은하'였는데, 이 여자는 남인수의 부인이었다. 그러니까 김해송은 남인수의 부인과, 이난영은 남인수와 염문을 가졌다.

그렇게 김해송과 김은하, 이난영과 남인수는 서로 애증의 인연을 맺었는데, 이후 남인수는 세상을 떠나기 전, 부인 김은하를 다시 찾았다고 한다.

유달산에서 본 목포


아무튼 두 집안의 악연은 자녀들에 의해서 끊어졌는데, 김은하의 딸과 이난영의 큰아들이 결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랑 앞에선 은인도 원수도 없는 셈이다.

이난영이 가수 데뷔 6년째일 때였다 한다. 그녀는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의 예술가(연예인)들은 걸핏하면 결혼했다가 이별을 하는데, 나는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별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난영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족상잔의 비극 6·25라는 불가항력적인 사유로 남편과 헤어졌고, 이후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가족관계에서 만큼은 매우 불우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어느 남자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했으니, 목포의 눈물은 이별의 슬픔을 견디는 뭍사람의 눈물이었으며 또한 자신의 눈물이기도 했던 셈이다.

유달산 이난영 노래비


이난영과 김해송의 7남매는 미국으로 건너가 김시스터스와 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62년 이난영은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8개월여 생활하였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1965년 4월 11일 49세에 서울 회현동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107에 외로운 몸을 뉘었다가, 2006년에 고향인 목포 삼학도 자락 난영공원으로 왔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삶이었을지 모르지만, 노래를 통해 시대와 개인의 아픔을 희망으로 승화시킨 이난영의 노래는 뜨거운 눈물이요, 불타는 사랑으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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