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행의 세상읽기

인문지행의 세상읽기- 상인이 바꾼 동아시아 모습

입력 2018.07.06. 00:00
사회 전면 변화 이끌어낸 상인들 근현대화 주도적 역할

삼국시대부터 사·농·공·상 신분의식 지배적

일본은 상인 주도로 근현대화 이룩 강대국 발전

◆고대 그리스의 번영 이끈 상업

서구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에서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전되었다. 같은 지중해의 이탈리아나 이베리아 반도에 비해 그리스는 산지가 많아 땅이 척박한 편이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 사람들은 일찍부터 곡물을 구하려고 바다로 나섰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의 신화 세계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베리아 반도 남단의 지브롤터 해협에서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코카서스 산맥 지역까지로 넓게 걸쳐 있다. 곡물과 상대적으로 그리스는 전체적으로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이어서 곡물 대신 과수 재배에 유리했다.

중국과 한국은 사·농·공·상의 순서로 상업이 직업상 가장 낮았지만, 위와 같은 자연조건을 가진 그리스는 원래부터 상업이 가장 중요했다.

그에 관한 자세한 것은 지면상 각설하고 델로스 섬의 예를 들어보자. 델로스 섬은 아폴론 신의 탄생지라는 신성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에게 해의 중심지에 위치한 지정학적 장점 덕분에 국제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요건을 원래부터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는 바위투성이 섬은 기원전 5세기부터 600여 년 동안 세계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국제도시가 될 수 있었고, 기원전 2세기에는 '국제항'으로 선포되어 세금이 없는 자유무역항이 되었다. 그리하여 델로스 동맹 같은 국제회의가 모두 이 섬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한편 유럽에서 지중해를 건너면 바로 오늘날의 시리아·이란에 해당하는 페니키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을 왕래하는 그리스 상인들이 자음만 있는 페니키아 문자를 그리스에 전해주었고, 그리스에서 여기에다가 모음을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마침내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서양어의 알파벳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문자뿐만 아니라 그리스 상인들은 당시에는 유럽보다 앞섰던 선진 오리엔트 문명을 전해주는 문명의 전달자이기도 했다.

◆상업을 천시한 중국

그런데 그리스와는 완전히 상반되게 중국에서는 상업이란 직업이 태생적으로 좋지 않았다.

강남은 오·월·초(현재의 저장, 부젠, 광둥) 지역으로 당시에는 사람이 살기 힘든 편벽된 곳이었다. 강남지역이 개발이 되어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된 것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이니 매우 늦다.

강북지역을 죄수와 상인이 없는 곳으로 정화시키고 중국을 농업국가로 만든다는 것이 진시황의 목표였다. 상인들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쫓겨날 때 호곡 소리가 천지에 가득했다고 한다. 상인들은 이주 중 많이 죽고 이주한 후에도 현지인의 박해를 받아 산으로 도망하기도 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면 바다를 통해 해외로 가서 장사를 했으니, 이것이 바로 화교가 생기게 된 최초 원인이었다.

17세기 명말청초(明末淸初)에는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이란 사람이 화교를 규합하여 반청운동을 하다가 실패하자 당시 네덜란드인이 점령하고 있던 대만을 정복하여 정부를 수립하였다. 정성공은 화교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니, 가장 증오하는 진시황과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 세계에 오천만 명 정도의 화교가 있는데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18세기 초부터는 유럽을 통해 세계 무역에 눈을 뜨고, 사상적으로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는 실학이 새로운 사조로 자리 잡은 것이 상인들의 위상 제고에 큰 동력이 되었다.

#그림1중앙#

◆중국의 복사판 '한국'

이제 한국 쪽을 보자. 한국의 상인에 대한 천시도 중국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 삼국시대부터 사·농·공·상의 신분의식이 지배적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여서 상인이 그 틀을 깬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보고가 한 때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했지만 그가 존경을 받은 것은 상인으로서가 아니라 장군과 귀족이라는 신분에 의한 것이었다.

중국·한국과 대조적으로 일본의 상인은 일찍부터 상류사회에 진입했다. 특히 17세기 최초로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 정치·사회가 안정되자 운송이 매우 활발해지고, 그에 수반하여 금융이 발전했으며, 경제에 여유가 있자 대중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예능과 문화가 요구되었다. 특별한 교양이 없어도 보고 즐길 수 있는 공연이 성행하여 모든 계층이 보고 즐길 수 있었다.

18세기 에도(江戶, 지금의 교토)는 인구가 100만 명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일본 전체적으로도 에도, 오사카, 나고야, 가나자 같은 도시 인구가 전체의 5-7%가 되어 도시인구 2% 정도의 유럽보다도 더 많았다.

상인가문도 등장했는데, 미쓰이(三井) 가문이 유명하다. 그 기원을 따라가면 '미쓰이재벌'의 시조로 평가받는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는 1673년 교토(京都)와 에도에 포목점을 열었다. 미쓰이 가문의 포목점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정찰제와 현금 거래를 내세웠다.

◆상업 발전으로 선진국 도약한 일본 #그림2중앙#

미쓰이 가문은 또한 비가 오면 고객에게 회사 이름이 새겨진 우산을 빌려주는 등 현대식 마케팅 기법을 도입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일본의 개방이 본격화 되었던 메이지시대(1868-1912)에 미쓰이 가문은 은행, 무역, 광업 등에 진출하며 세력을 넓혔다. 1909년 지주회사격인 미쓰이합명회사(三井合名會社)를 세우고 재벌의 면모를 갖췄다. 이후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시점에는 약 270개의 회사를 보유한 거대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한편 도시를 거점으로 성장한 일본의 도시 상인 집단을 죠닌(町人)이라 부르는데 죠닌은 일본문화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죠닌은 먼저 상인과 농민들에게 글과 예절 등을 가르치는 학교를 전국에 세워 교육의 기회 확대를 선도했다. 죠닌은 차를 즐겨 마시고 그것을 고도의 예절로 발전시킨 결과, 차를 마시는 예술, 즉 다도(茶道)가 보편화 되었다.

바야흐로 상인이 중심이 된 죠닌문화가 일본문화의 근현대화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즉 일본은 근대 이후 상인을 통해 사회가 발전하고 통합되며 신분의 차이를 극복했으며, 그것이 메이지 유신이라는 기폭제를 만남으로써 바야흐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글 내용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서양이 동양을 앞선 것은 상업을 중시했기 때문이요, 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앞선 것도 상업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양반·상놈 따지면서 상인을 천대할 때, 일본은 상인이 사회 전면에서 변화를 이끌었다. 그로 인해 일본은 현재 동양에서 유일하게 소위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현재 일본과 한국의 차이가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여긴다.

전남대 중어중문과 교수

#그림3오른쪽#

장춘석은

전남대를 나와 파리 제7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 박물관장을 지냈고 현재 전남대 중어중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샤머니즘' '중한효행집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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