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21>마한 남부 연맹의 ‘타임캡슐’,‘다시들’ 복암리 고분군下

입력 2018.05.22. 00:00
평지에 위치 농업 생산력 발달 발전 동력 확보
정촌 고분에 추가장이 도입될 무렵
형성되기 시작한 복암리 3호분의
묘제 및 부장품들을 통해 다시들
연맹체 세력 내부의 주도권이
바꾸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부장품 규모만
청촌 고분 현실 (발견당시 평명도)

경주의 대릉원에 있는 대형 고분들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영암 시종, 나주 반남, 다시들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수많은 거대 고분들은 이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웅변해주고 있다.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 공주, 부여 지역에서는 이러한 대형 고분들이 쉽게 찾아지지 않고 있어 4세기 후반부터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통설이 사실과 다름을 확인시켜준다. 영산강 유역 정치체들이 각기 연맹체를 구성하며 고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옹관묘의 조영 및 영산강식 토기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 옹관묘 가운데 가장 발달한 U자형 전용 옹관은, 최근 발굴 조사된 나주 오량동 요지에서 거의 유일하게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그곳에서 생산된 옹관이 인근 지역의 옹관 수요를 독점했다는 것이다. 곧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유행한 U자 옹관을 생산하고 관리하였던 세력이 이 지역의 핵심 세력을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신촌리 9호분이 있는 나주 반남 지역이 주목되었다. 거대한 봉분에 금동관까지 출토된 신촌리 9호분은 다른 옹관고분군의 중앙에 위치하여 있고, 오량동 도요지와도 10km이내에 있어 옹관고분을 조영한 집단의 중심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반남 지역은, 다른 인근 영산강 유역의 여러 지역에서 5세기에 들어 석실묘 등 새로운 묘제를 도입하는 등 변화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6세기 중엽 백제식 석실로 대체될 때까지 다른 묘제를 차용하지 않은 채 옹관 묘제만 조영되고 있었다. 물론 왜, 가야 계통의 금동관 양식 및 왜계 분주 토기 등의 흔적에서 이 지역이 외래 문화 수용에도 소극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른 지역보다 강한 토착성을 견지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화를 기반으로 마한 남부연맹의 대국 '내비리국'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훗날 백제에의 복속을 끝까지 거부하다 '절단 낸다'는 의미의 '半'이 들어가 백제 때 '반내부리현'이 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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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하였지만, 복암리 3호분 가운데 6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실분에서 옹관고분이 함께 확인되어 이 지역이 그때까지도 옹관고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들 지역은, 옹관고분 밀집 지역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옹관고분 사회 전시기를 대표하는 중심세력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3호분 96석실에서 출토된 옹관의 경우도 성행기가 아닌 쇠퇴기 옹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미약한 옹관묘제의 전통은, 기존 옹관묘와 더불어 새로이 유입된 석실분이 유입되어 독자적 묘제로 발전하는 여건을 마련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바야흐로 영암 옥야리 장동 고분에서 시작된 석실분이 나주 가흥리 고분을 거쳐 복암리 지역에 와서 영산강식 석실의 전형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영산강식 석실분이 해남반도 연안, 영산강 중·하류 연안, 함평-광주 노선 등 영산강 하구에서부터 영산강 본류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반면, 반남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는 삼포강 일대에는 거의 출현하지 않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는 5세기 중엽에 이르러 기존 옹관묘 중심의 반남 지역 연맹체인 내비리국에 맞서는 새로운 집단이 다시들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영산강을 마주보며 양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반남 지역에서 복암리 지역으로 영산강 유역의 주도권이 넘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 시기에 금동관이 출토된 거대한 신촌리 9호분이 조영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신촌리 세력은 여전히 강고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 타당하지 않은 주장이라 여겨진다.

한편, 정촌고분과 복암리 3호분에 보이는 금동신발과 석실분을 백제의 위세품 내지는 백제 계통으로 해석하여 복암리 세력이 성장하는 과정에 백제의 역할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앞서 살핀 바처럼, 복암리 석실은 적어도 6세기 중엽까지는 백제 계통이 아닌 영산강식 석실분의 특질이 강하게 묻어있었다. 또한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처럼 이 지역의 금동신발 또한 백제의 위세품이 아니라 현지 재지 세력들이 제작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백제의 영향력이 작용하였다면 정촌고분처럼 일본에서 금송을 수입하여 웅장하게 묘역을 조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두 곳 금동신발 제작시기가 한성시기 말기라고 한다면, 당시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백제가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복속하려 시도했다는 것 또한 믿기 어렵다. 결국 백제가 반남과 복암리 세력들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은 명백하다 하겠다.

누차 강조한 바이지만, 다시들 지역은, 영산강이 곡류하여 이루어진 비옥한 충적 평야의 높은 농업생산력과 정촌세력의 거점인 회진포구를 통해 이루어진 활발한 대외 교역 등이 밑거름이 되어 빠른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였을 것이다. 이곳과 인접한 광주 명화동 지역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을 비롯하여 영산강 상류에 해당하는 신창동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고조선 시대의 유물들은 바로 회진 포구를 경유하여 이루어졌던 당시 교역 실태를 보여준다.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 일대에 위치한 내비리국 등의 연맹체가 전통적인 농업에 의존한 것과 비교된다.

한편, 다시들 일대의 가흥리, 영동리, 복암리 고분들이 모두 옹관고분을 같은 시기에 조영하고 있어 이들 지역이 동일한 옹관고분 세력권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정촌 고분 세력은, 출토된 금동신발과 백제 무령왕릉 등 왕릉에 사용되고 있는 일본산 금송(金松)을 묘제에 이용한 데서 그 세력을 상상할 수 있고, 역시 복암리 지역 세력 또한 금동신발 및 은화관식 등 수많은 출토 부장품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추측컨대 두 세력은 다시들 집단 내에서 병존하여 경쟁하였다고 짐작된다. 그렇지만 고식 옹관의 분포가 복암리 지역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미루어 고분군이 처음에는 평지에 가까운 구릉 사면에 조영되다가 평지의 다시들 유적이 위치한 복암리 쪽으로 확장되어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모습은 횡구식 석실분이 가흥리 고분에서 정촌고분을 거쳐 복암리 3호분 고분으로 확산되어 가고, 정촌 고분에서 추가장이 이루어질 때 복암리 3호분 고분에서 영산강식 석실분이 축조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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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두 집단이 세력 차이가 크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정촌 세력이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말하자면 영산지중해의 대표적 포구인 회진포구에 위치하여 새로운 문물 유입과 중개무역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정촌 세력이 연맹의 주도권을 앞서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복암리 3호분과 지근거리에 있는 정촌 고분이 입지, 축조기법, 석실의 세부구조, 내부 매장 시설로 목관을 사용하는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요소가 많은 것은, 바로 정촌 세력이 새로운 문물을 앞서 수용하고 있는 모습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촌 고분에 추가장이 도입될 무렵 형성되기 시작한 복암리 3호분의 묘제 및 부장품들을 통해 다시들 연맹체 세력 내부의 주도권이 바꾸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부장품 규모만 놓고 보더라도 복암리 일대가 정촌 고분보다 훨씬 많고, 장식마구와 은화관식등 정촌고분에는 보이지 않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서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곧 비록 포구에 위치하여 외부 문물을 빨리 유입하였지만, 잠애산 경사면에 위치하였던 정촌 세력보다는 다시들 평지에 위치하여 보다 발달한 농업 생산력을 확보하며 정촌 세력을 통해 외부 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복암리 세력이 발전의 동력을 확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다시들 지역에는 정촌, 복암리 등 다른 지역의 대국수준에 해당하는 정치체들이 하나의 연맹체를 형성하여 강력한 정치체로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복암리 3호분과 같은 영산강식 석실분의 핵심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석실분 형식이 신안 안좌도 읍동 고분군과 신안 상태도 상서 고분군 등 영산강 하구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고분들 형식이 석실의 종단면형이나 벽면의 석재구성 등에서 부여 능산리식 석실과 차이가 엄연히 있다는 점에서 백제와의 관련성보다는 복암리 세력의 영향력이 그곳까지 미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전북대 김낙중 교수의 의견처럼, 이제 다시들 세력이 영산강 중·하류 연안을 아우르는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생각된다. 조선 성종 때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신안 압해도와 장산도를 나주 관할에 두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인식의 반영이 아닌가 싶다. 백제를 멸하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한 당(唐)이, 복암리 지역에 대방주 치소(治所)를 두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이제 영산지중해의 또 다른 대국으로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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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오량동 도요지

나주시 오량동 산 57번지에 있는 도요지로 사적 456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1년 유적이 발견된 이래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 2007년부터 8차례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영산강의 남안 구릉지역으로 영산강 본류를 마주하며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반남 고분군사이에 있어 교통의 요지에 해당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77기의 가마가 밀집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4세기 후반!6세기 초반까지 100~150년의 일정 기간 옹관이 생산되었고, 특히 5세기 무렵의 영산강 중하류 지역에 성행한 U자형 옹관의 주생산지로 유명하다. 이와 같은 전용옹관의 제작 과정과 제작 집단, 운송과 교류 등을 비교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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