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32>광주학생독립운동의 이름 없는 별들, 이광춘과 박기옥

입력 2018.04.17. 00:00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 '댕기머리' 사건 주인공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전면에는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나라와 민족,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할 학생들이 명심해야할
나주 남내동 이광춘 생가

1929년 10월 30일 오후 광주역을

출발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하였다.

일인 중학생 후꾸다(福田)가

개찰구를 나가는 박기옥과

친구인 이와기 긴꼬(岩城錦子),

이광춘 등 여학생들의 머리댕기를

잡아당기며 희희덕거렸고,

마침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분노하여 후꾸다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바로 이 일이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되었으니,

바로 댕기머리 사건이다.

박기옥과 이광춘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이 되었던 '댕기머리' 사건의 주인공이다.

1929년 10월 30일이다. 이날 오후 광주역을 출발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하였다. 일인 중학생 후꾸다(福田)가 개찰구를 나가는 박기옥과 친구인 이와기 긴꼬(岩城錦子), 이광춘 등 여학생들의 머리댕기를 잡아당기며 희희덕거렸고, 마침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분노하여 후꾸다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바로 이 일이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되었으니, 바로 댕기머리 사건이다.

이 댕기머리 사건의 주인공 박기옥의 할아버지 남파 박재규는 한말에 장흥군수를 지냈고 나주에서 제일 부자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도 나주 남내동의 남파고택(박경중가옥)은 호남지방의 대표적 한옥으로 남아있다. 1910년 곡성군수였던 박재규는 강제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고향인 나주로 낙향하였다. 박재규에게는 박정업, 박관업 등 두 아들이 있었다.

#그림1중앙#

박재규의 장남 박정업은 박준삼과 박준채 등 6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인 박준삼은 서울중앙고보 4학년 때 3·1운동을 맞아 옥고를 치렀다. 1914년에 태어난 4남 박준채는 1929년 광주고보 2학년이었다. 당시 광주에는 한국인 학생이 다니는 광주고보와 일본인 학생이 다니는 광주중학교 등이 있었다.

박재규의 차남 박관업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맏딸 박기옥은 1913년 나주에서 태어났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던 1929년에 광주여고보 3학년이었으며 보통 키에 활달했고 바르고 강직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이 1929년의 댕기머리 사건을 박기옥의 한 살 아래 사촌동생 박준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경,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했을 때였다. 개찰구 쪽으로 걸어가는 데 앞에서 일본 학생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광주중학교 4학년인 후꾸다, 스에요시, 다나까 등이 기옥이 누나와 이와기 긴꼬, 이광춘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고 있었다. 기옥이 누나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나는 후꾸다에게 '너는 명색이 중학생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하며 따졌다. 이에 후꾸다가 '뭐라고 센진노 구세니….(조선인 주제에)' 라고 했을 때, 그만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그 자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싸움은 곧장 집단으로 번졌다. 이때 순찰 중이던 일본이 순사 모리다가 달려와 불문곡직하고 나의 따귀를 때렸다."

#그림2중앙#

이날 싸움은 다음날인 10월 31일로 이어져 오전 등교 통학열차에서 한국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다툼이 있었고, 오후 하교 열차에서 박준채와 후꾸다는 다시 맞붙어 싸웠다.

11월 1일이다. 광주역에서 야구방망이, 죽창, 죽검을 든 일본인 광주중학생 30여명이 유도 선생 이다(伊田)와 함께 한국 학생들을 공격했다. 순식간에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기차 레일을 두고 대치했고, 경찰이 달려왔다.

#그림3중앙#

11월 3일은 일요일로 일제의 국경일인 명치절이었다. 또 음력 10월 3일로 단군이 조선을 개국한 개천절이기도 했다. 이날 오후 광주시내에서는 일제의 만행과 민족차별에 격분한 한국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박준채는 다음 날인 4일 전남경찰부에 잡혀갔고, 미결수로 1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뒤 연소자라는 이유로 출감했다. 집에 오자 퇴학통지서가 와있었다.

박기옥도 이때에 투옥 되어 3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였고 역시 광주여고보에서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일경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감시를 받으며 4년여를 집에서 갇혀 지냈다.

그러다 목포의 서익철에게 시집을 갔으나, 불우한 결혼생활은 계속 되었다. 집을 떠난 남편을 찾아 두 딸을 데리고 서울로 가 혜화동에서 셋방을 얻어 살았다.

1945년 해방을 맞을 무렵에는 오랜 지병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광복의 기쁜 소식에 거리로 나가 만세를 부르다가 그만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거리에 쓰러진 남루한 옷차림의 여인을 누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라고 생각했겠는가?

이후 박기옥은 이렇다 할 치료를 받거나 약을 쓰지 못한 채 병석에 누워 있다가 1946년 주사 쇼크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16살의 젊은 나이에 일제에 항거했으나, 서른셋의 나이에 그만 아름다운 청춘을 잃어버린 채 이름 없는 별이 되고만 것이다.

#그림4중앙#

또 박기옥의 친구로 싸움의 발단이 된 이와기 긴꼬는 아버지가 일본인이었고, 이광춘과는 이복형제였다. 얼굴이 예쁘고 혼혈이라, 평상시에도 일본학생들의 놀림감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녀 역시 소녀회 조직에 앞장섰고, 항일정신도 투철했으나, 전라북도 이리(익산시)의 한국인에게 출가한 뒤, 병사하였다.

이광춘 역시 소녀회 조직과 독서회를 이끌었던 투쟁가였다. 댕기머리 사건이 있었던 1929년 10월 30일 이후, 11월 3일의 1차 시위, 12일의 2차시위에 치마에 돌멩이를 싸들고 항거했으며, 해를 넘겨 1930년 1월 13일 학교에서 시험을 보던 날이다.

이광춘은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시험답안지에 한 글자도 쓰지 말자는 백지동맹을 이끌었다. 이 일로 1월 15일 퇴학처분과 함께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54년 모교인 전남여자고등학교의 명예졸업장을 받았고, 2010년 4월 12일 96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전면에는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나라와 민족,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할 학생들이 명심해야할 지표이며 영원히 이어갈 숭고한 뜻과 정신일 것이다.

#그림5중앙#

그런 마음으로 이 땅의 자주와 민주,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고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항거하고 투쟁했던 학생들, 그 이름 없는 별들에게 삼가 고개를 숙여 명복을 빈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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