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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29>홍주 백씨, 석봉 한 호의 어머니
천리 타향살이에 떡 팔아 아들 한석봉 '뒷바라지'
입력시간 : 2018. 02.20. 00:00


영암 덕진면 영보정 현판
홍주 백씨는 석봉 한호의 어머니다. 중종(1488~1544) 때 개성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같은 고을 청주 한씨 가문의 한언공(韓彦恭)에게 출가하였다.

남편 한언공은 곡산군수를 지낸 한대기(1420~1473)의 4대손으로 부친은 정랑을 지낸 한세관이었다.

혼례를 치른 홍주 백씨는 곧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 대신 호인 석봉으로 더 알려진 한호(韓濩 1543~1605)이다.

한호가 태어났을 때 일관이 점을 쳐보고 '옥토끼가 동쪽에 태어나면 낙양의 종이 값이 오르는 법인데,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운이 겹쳤다. 홍주 백씨는 아들 한호가 2살 때에 남편을 잃었다. 9살 때에는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떴다. 가세마저 기울어 어린 한호를 키울 일이 막막하였다.

하지만 한호는 영특할 뿐더러, 점쟁이의 예언대로 글씨에 뛰어났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만 나면 글씨를 썼다.

영암 군서면 육우당 현판


김육(1580~1658)이 엮은 개성의 지리서 중경지(송도지)는 '한호는 집이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 집을 나가서는 돌다리에 글씨를 쓰고, 집에서는 질그릇이나 항아리에다 글씨연습을 했다.'고 기록했다.

또 한호의 묘갈문에도 '꿈에 왕희지(王羲之)로부터 글씨를 받아 마음 속으로 자부하고 법첩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서 해서에서 초서에 이르기까지 그 묘함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너는 그리도 글씨 쓰는 게 좋으냐?"

"그래요. 글씨를 쓰고 있으면 행복해요."

사람들은 한호가 글씨 쓰기를 위해 태어난 아이라고 했다.

석봉 한호 해서첩


하지만 홍주 백씨는 근심이 깊었다. 남편과 시아버지마저 죽고, 집안이 풍비박산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끼니를 끓이는 것도 문제지만, 한호의 교육문제에 눈앞이 캄캄했다.

1552년 한호가 9살 때다. 이때에 홍주 백씨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신희남(1517~1591)이다. 신희남은 영암 사람으로 명종시대의 문필가인 신영명의 손자다. 아버지는 병절교위를 지낸 신우장, 어머니는 평시령을 지낸 김제의 딸이었다.

이 신희남이 154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대과를 준비할 때였다. 신희남은 같은 거창 신씨로 을사사화(1545)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양주에 유배 중인 신거관(1498~1564)과 개성의 백인걸(1497~1579)을 만나러 갔다.

백인걸은 1537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남평 현감을 지낸 사람이다. 1547년 백인걸은 안변에 유배되었고, 1551년에 사면되어 개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또 이미 고인이 됐지만 개성은 신희남이 평소에 존경했던 서경덕(1489~1546)이 살았던 곳이었다.

"마침 잘 왔네. 이곳 개성에 글씨 신동이 있다네."

신희남은 백인걸로부터 글씨 신동인 한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백인걸의 주선으로 한호를 만나게 되었다.

과연 한호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신회남은 한호에게 필법 몇 가지를 바로 잡아주었다.

"우리 아이의 스승이 되어주십시오."

홍주 백씨는 신회남의 발아래 엎드려 부탁을 했다.

"그렇게 하시게. 왕대밭에 왕대 나는 법이니,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가 당연지사 아닌가?"

백인걸도 적극 추천을 하며 거들었다.

"내 고향은 영암이오. 이곳 개성에서 천리도 더 되는 먼 곳이오."

"아이의 장래를 위하는 길인데, 천리면 어떻고 만리면 또 어떻습니까?"

석봉 한호 해서첩


홍주 백씨의 결심은 단호했다.

"좋소. 하지만 내 형편도 넉넉지 못하니, 아이가 고생을 할 것이오."

마침내 신회남은 한호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저도 영암으로 가,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겠습니다."

홍주 백씨는 얼마 되지 않은 가산을 정리한 뒤, 한호를 데리고 신회남의 뒤를 따라 영암으로 향했다. 홍주 백씨와 한호의 영암 생활이 시작되었다.

신희남은 영암 구림의 죽림정사에서 자신의 대과 준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홍주 백씨는 영암군 서호면 아천포 다릿거리 장터에서 떡장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간척지가 되었지만, 당시 아천포는 수많은 갯배들이 들락거리는 번창한 포구였다. 자연 떡장사도 잘 되었다. 한호의 학업 뒷바라지가 넉넉지는 못했지만, 큰 불편은 없었다.

1554년 한호가 11살이던 어느 날이다. 신희남이 대과를 치르러 한양에 가고 없을 때다.

한호는 불현 듯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월출산에 둥실 떠오른 달이 더욱 더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호는 밤길을 달려 어머니에게 갔다.

"어머니!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이다.

하지만 홍주 백씨의 표정은 냉랭하기만 했다. 말없이 떡 썰 준비를 한 뒤, 한호에게도 글씨 쓸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불을 껐다.

"넌 글씨를 쓰고, 난 떡을 썰 테다. 누가 더 잘하는지 보자."

개성의 한석봉 묘소


한참 뒤, 불을 켜니 홍주 백씨가 썬 떡은 보기 좋았지만, 한호의 글씨는 크기나 모양이 고르지 못하였다.

"불을 끄고도 잘 쓸 수 있을 때까지 집에 올 생각을 하지 말거라."

홍주 백씨는 한호를 내쫓다시피 서당으로 돌려보냈다.

1567년 세월이 흘러 24살 때, 한호는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83년 사헌부 감찰,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왕의 행재소서 문서관계의 일을 맡았다. 그리고 가평군수, 흡곡현령 등을 지냈다.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왕희지에 버금가는 명필이라는 아낌없는 칭송을 들었다.

영암 학산면 독천장터


이렇듯 명필, 석봉 한호의 이름에는 어머니 홍주 백씨와 스승인 신희남의 아름다운 은혜가 더해져 더욱 빛이 나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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