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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28>덕진 여사, 덕진 다리
한푼 두푼 삼백냥 모아 돌다리 세운 주막 객주
입력시간 : 2018. 02.06. 00:00


영암 덕진면 덕진제
영암읍 남쪽 망호리와 북쪽 덕진리 사이에 흐르는 내가 영암천이다. 영암천은 월출산(811m) 동쪽 마을 학송리 풀고개 북쪽에서 나와 영암읍 동무리와 역리, 서남리의 동쪽 큰 들을 지나 덕진리에 이른다.

예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덕진리의 영암천에 있던 다리가 덕진교다.

덕진은 바다가 깊숙이 육지로 들어온 만이었고, 세곡을 실어 나른 조운창이 있었다. 1830년에 간행된 서유구의 농업경제박물서 '임원경제지'는 고깃배들이 닻을 내리는 이곳 덕진에 3·8일의 5일장이 섰다고 했다. 또 장날이면 천변 백사장은 해수찜객까지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고 했다.

이러니 덕진교는 주민, 나그네, 장사꾼 등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다리였다.

때는 신라 시대였다. 이 덕진 나루에 객주집이 하나 있었다. 주인은 덕진이라는 여인이었다. 일찍이 혼자되어
덕진비


객주를 열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하루 쉬어갑시다. 물이 불어 가지 못하겠소."

비가 잦은 여름이면 내를 건너다 변을 당하는 사람도 있어서, 사람들에게 덕진 여인의 객주집은 고마운 쉼터였다.

영암 옛 덕진다리 터


여러 날 비가 이어지던 때, 한 나그네가 바쁜 걸음으로 객주로 들어왔다.

"아주머니! 어떻게 내를 건널 수 없겠습니까?"

"아이구, 어쩌지요. 지금은 물이 불어 건널 수 없다오."

"급히 소식을 전해야 하는 데 이거 큰일이오. 이런 곳에는 다리가 있어야 하는 데…."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지난 번 큰물에 떠내려갔지요."

"돌다리를 놓아야 큰 비에도 떠내려가지 않을 것이요."

나그네의 말에 덕진 여인은 귀가 번쩍 틔였다.

"그 돌다리를 놓으려면 돈이 많이 들겠지요?"

"삼백 냥은 있어야할 거요. 왜 아주머니가 돌다리를 놓아주려오?"

덕진 여인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돌다리를 놓아야겠다. 오가는 길손을 위해 다리를 놓아야겠다.'

영암 옛 덕진다리 터


덕진 여인은 항아리를 하나 샀다. 부엌 뒤쪽에 땅을 파고 묻은 뒤, 한푼 두푼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며 항아리의 돈은 차근차근 불어났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티끌모아 태산이라더니 삼백 냥이 다 되었구나. 이제 곧 고을 원님께 돈을 드려 다리를 놓도록 해야지.'

덕진 여인은 돈이 채워지는 항아리를 볼 때마다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다.

'됐다. 이제 원님께 이 돈을 드려야지.'

덕진여사 제향


마침내 덕진 여인의 항아리는 돈으로 가득 찼다. 항아리에 뚜껑을 덮으며 덕진 여인의 가슴은 뿌듯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덕진 여인이 항아리에 돈을 가득 채운 지 사흘 뒤다. 상주도 없는 초라한 상여 한 채가 산으로 갔다. 덕진 여인이 갑자기 죽어버린 것이다.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러게 말야. 갑자기 죽다니 믿어지지가 않네."

마을 사람들은 덕진 여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장례를 치러주었다.

얼마 뒤, 영암고을의 원님이 바뀌었다. 그리고 부임 첫 날 밤이다. 꿈에 어떤 여인이 나타났다.

"원님, 제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넌 누구냐?"

원님은 흰 소복을 입은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덕진이라고 합니다."

덕진 여인은 그동안 다리를 놓기 위해 모은 돈 이야기를 했다.

"제가 그렇게 돈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그만 이승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살던 집 부엌 뒤, 서쪽으로 다섯 걸음 째 땅을 파면 항아리 하나가 있을 겁니다. 원님, 그 돈으로 부디 돌다리를 놓아 저의 소원을 풀어주십시오."

다음날, 아침 일찍 원님은 덕진 여인이 말한 곳으로 가서 땅을 파 보았다. 그러자 돈 항아리가 나왔고, 영암과 덕진 사이에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

다리 이름은 덕진 여인의 갸륵한 뜻을 살려 덕진교라고 했다.

그 뒤 어느 때인지 앉은뱅이가 덕진교를 지나가다 벌떡 일어났다는 얘기가 보태어졌다.

1813년(순종13)이다. 덕진 여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덕진 여인의 주막이 있던 자리에 대석교창주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를 세웠다. 그리고 매년 단오에 제향을 하며 그 덕을 기렸다.

영암천과 덕진들판


송시열의 제자인 송상기(1657~1723)의 덕진교에 대한 시다.

'영산강과 덕진교/ 두 곳 모두 푸른 바닷물 오가네// 십리에 늘어선 돛배 상인들 모이고/ 마을마다 울타리에 대나무가 많구나// 산천의 풍광 색다름을 깨닫노니/ 서울과 멀리 떨어진들 어떠하리/ 머물고 싶어도 물을 겨를 없나니/ 쫓겨난 신하 말을 멈출 수 없구나.'

서거정(1420~1488)이 이사군을 보내는 시 '죽림신순장룡추(竹林新筍長龍雛)'에도 덕진교에 대한 구절이 있다.

'황원(黃原)이 바다를 진무(鎭撫)한다 말하는 것 같더니, 그대를 보내노라. 이제 다시 어부(魚符)를 찼도다. 덕진(德津)에는 물이 얕아도 다리가 아직 있고, 도갑(道岬)에는 비석이 남았는데 글씨가 반은 없구나. 매화나무 언덕엔 꽃이 눈처럼 흩날리고, 죽림의 새 죽순은 용의 새끼가 자란 듯, 흰 머리 외로이 노는 흥취를 저버리니, 누가 호남의 색칠한 그림을 보내주랴.'

덕진 여인의 공덕이 다리가 되어 뭍사람의 발길을 가볍게 하고, 후세 시인들의 노래가 되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덕진 여인이 후세에 남긴 교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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