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13>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신창동의 마한 유적下

입력 2018.01.29. 00:00
중·일 연결하는 중계 무역 중심지 '영산강 마한'
신창동에서는 고조선 점토대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점토대 토기는 한강 이남에서 출토돼
고조선의 남하와 관련해 해석한다
신창동 점토대 토기는
부여 송국리 유적과 다르게
점토대토기(신창동 출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에 "왜인은 대방(군)의 남동쪽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대방군에서 왜에 이르기까지는 해안을 돌아 물길로 가서 한국(韓國)을 거쳐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에 구야국에 도달하는데 7천 여리이다. 비로소 바다를 건너 천 여리를 가면 대마국에 도달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은 당시 한 군현에서 왜로 가는 교통로를 확인해주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특히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이라는 구절은 서남해안 즉 무안반도와 해남반도를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 군현-가야-왜를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남 군곡리 유적에서 나오는 복골과 야요이 계통 토기 등의 유물은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무안반도와 해남반도 사이에 있는 영산강 내해는 지중해를 형성한 것과 같은 형상으로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수많은 포구 흔적과 수문포 패총에서 출토되는 복골 등의 유물에서 한 군현 및 주변국과 중계무역을 하는 거점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창동 유적지에서는 BC3∼4C 무렵 고조선에서 유행하였던 점토대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점토대 토기는 부여 송국리 등 한강 이남에서 출토돼 고조선 세력의 남하와 관련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토기가 신창동 등 영산강 유역에서도 출토돼 이 지역과 고조선과의 연관성을 갖게 한다. 신창동 등지에서 출토된 점토대 토기는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는 다른 삼각형 점토대 토기라는 점이 특이하다.

말하자면 송국리 등 한강 유역을 통해 남하하는 유이민을 통해 전파된 것이 아니라 일찍이 영산강 유역 마한 세력과 고조선이 직접 교류를 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해주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림1중앙#

신창동 등 영산강 상류 지역에서 반량전(전한), 화천(신), 오수전(전한) 등 기원 전후의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화폐들도 출토되고 있어 기원 전후에 이미 한 군현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안지역 패총 등에서 출토되던 복골이 내륙인 이곳에서도 출토되고 있는 것도 이 지역이 외부와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신창동 유적지와 영산지중해 사이에 있는 광주 복룡동 지역에서 우리나라에서 처음 꾸러미로 된 화천이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당시 한 군현과 이 지역 정치체가 직접 교류를 하였다는 증거로 이해되고 있다.

말하자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낙랑, 대방 등 한 군현 세력이 고조선을 이어 영산강 세력과 교역을 계속하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낙랑계통의 수레바퀴통의 철경부동촉를 비롯하여 낙랑계토기, 그리고 왜의 야요이계 토기 등 외래 문물들이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더욱 방증해준다.

철경부동촉은 신부에 홈은 없고, 경부는 단명형태가 육각형이며 철경이 꽃혀 있고, 기형이 옹형인 토기는 구연은 직립되었고 상단에 안으로 수평에 가깝게 꺾여 있어 평양 오야리 출토 낙랑 토기 구연부와 유사하여 모두 낙랑 현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 지역 연맹체와 한 군현이 직접 교류한 증거로 해석하고 있는 복룡동 출토 화천 꾸러미 유물처럼, 신창동 지역의 출토 유물들도 낙랑국과 이 지역의 교류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출토 화폐를 가지고 지나치게 경제적인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두 지역의 활발한 교류를 반영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왜가 중국 군현과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간 기착지인 영산강 유역을 반드시 경유해야 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해남 군곡리 패총과 광산 평동 유적지 등에서 출토된 야요이계 토기가 이러한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신창동 유적지에서도 이 지역의 특성을 보여주는 삼각형점토대토기와 함께 저부 가운데 접지면이 좁고 높으며 동체부가 와반되어 올라가는 야요이계로 추정되는 토기가 출토되었다. 말하자면 영산강 내륙 깊숙한 곳까지 왜 상인들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이곳 내륙까지 들어오게 된 까닭은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신창동 유적의 벼껍질 압착층에서 추정하는 바와 같이 이곳은 동북아 최대의 곡물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에 있는 "(왜는) 농지가 조금 있지만, 경작해도 먹기에 여전히 부족하여 또한 남쪽과 북쪽으로 다니며 양식을 구입한다"라는 기록을 통해 이러한 추정은 가능하다.

이밖에도 신창동 출토 토기들 가운데 현무암 태토로 만든 토기가 주목되는데 이것은 이 지역과 제주 지역의 정치체의 교류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식량이 부족한 제주도에서도 이 지역과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약간 시기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5세기말 백제 동성왕이 탐라를 정벌하기 위해 이곳 무진주에 이르르자 탐라가 항복했다고 하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는데, 이는 신창동 정치체와 탐라 정치체가 일정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난 호에 이미 '신창동식 옹관'의 존재를 통해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 했지만 이 지역에서 이렇듯 한군현 및 왜와 교류 흔적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추정을 분명히 해준다. 영산지중해를 통해 유입된 새로운 문물을 내륙으로 연결해주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는 신창동 일대의 정치세력은 비옥한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군현과 왜와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며 독자적인 정치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음직하다.

#그림2중앙#

이와 관련하여 1997년 신창동 유적지에서 출토된 목제형 현악기가 관심을 끈다. 현재 원삼국(기원 전후∼AD3C경)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악기는 이곳을 비롯하여 경산 임당동, 창원 다호리, 그리고 낙랑 유적지 등 4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 지역과 낙랑 지역에서 출토되어 지역적, 역사적 특성을 헤아리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중에서 반파된 모습으로 발견된 신창동 유적 현악기는 거의 완전한 실물 형태로 우리나라 음악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10현금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현악기는 전체 길이가 77.2㎝로 임당동(67㎝), 다호리(64㎝)의 것과 비슷하고, 중앙이 볼록한 凹 모양 역시 서로 공통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반면 낙랑 지역의 석암리에서 출토된 현악기는 길이가 110㎝로 훨씬 길고 두께도 두꺼워 이들과 차이가 있어 중국 계통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삼한 지역에서 발견된 악기가 서로 비슷한 특질을 보이는 것은 동일 문화권의 영향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들 지역에서 고조선에서 널리 사용된 점토대토기가 출토되는 것과 관련하여 고조선 유이민들의 남하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한 지역에 해당하는 가야의 유명한 가야금은 12현으로 크기나 양이두의 형태가 앞서 삼한 시대에 유행하였던 현악기와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가야금은 기존 현악기와 다른 그 지역의 재지적 특성을 지녔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현악기인 '고토'가 재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듯이 당시 악기들이 지역적인 독자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거창 다호리나 경산 임당동에서 출토된 현악기들의 특성이 신창동 유적에서 원형에 가깝게 출토된 것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현악기들은 고조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 보다는 신창동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된 현악기가 교류를 통해 전파되었던 것이라고 살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살필 수 있다면 신창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상당한 정치 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즉, 이미 BC3C 경 고조선과 일찍 교류를 하며 보다 발달한 선진문화를 접하며 사회를 발전시켰던 이들 정치체들은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백제 등 마한 북부 연맹체들을 통하지 않고 영산강을 통해 낙랑 등 한 군현 및 왜 등 외부 세력과 직접적인 교류하며 사회를 발전시켰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내륙의 풍부한 물산을 토대로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그들의 고유한 문화 전통을 만들어갔음에 분명하다.

'신창동식 옹관'이라고 하는 고유의 무덤 양식, 옹형 형식의 삼각점토대 토기 그리고 현악기의 모습 등은 이러한 추정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게 한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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