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27>아왕공주와 조통장군

입력 2018.01.24. 00:00
병든 몸 낫게 한 무속으로 백성들 마음 위로
아왕공주는 조통에게
마음을 숨김없이 고백하였다
이어 부왕을 찾아 결혼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조통은 이미 처자가 있었다
고민 끝에 공주 곁을 떠나기로 했다
제가 북변정벌을 하겠습니다
옥과 성황사와 옥산사

아왕공주(我王公主)는 고려 신종의 딸로 본명이 공심(公心)이다.

고려 20대 국왕 신종(1144~1204)은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의 다섯째 아들로 1197년부터 1204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는 최충헌의 무신정권 시기였다. 당시 일부 집단의 권력 독식은 고려 사회를 극도로 부패시켰고, 백성들은 권력층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다.

1198년 최충헌의 종 만적의 난, 1199년 명주(강릉)의 도적이 삼척과 울진 두 현을 함락시켰고, 동경(경주)에서도 도적이 일어나 명주현의 도적과 연합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1200년 4월 진주 민란, 같은 달에 밀성(밀양)의 관노 50여 명의 관가 습격, 운문(청도)의 난민들 반란이 있었다. 8월에는 동경(경주)에서 이의민의 친족들과 아전들의 싸움이 있었다. 김해에서도 하층민들이 관군과 대치하였다.

#그림1중앙#

이에 '신종실록'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고 있다.

'신종은 최충헌이 세운 임금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는 것과 임명하고 파직시키는 문제는 전부 최충헌에 의해 좌우되었다. 신종은 허수아비처럼 왕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 신종은 선정왕후 김 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두 아들은 21대 왕 희종과 양양공 서이며 두 딸은 효회와, 경녕이다. 이 두 딸 중 과연 누가 아왕공주 공심이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또 다른 공주가 더 있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옥과의 성황당에 모셔진 고려의 아왕공주와 조통장군, 그리고 무속에서 '우리 임금아, 공심은 우리 제례의 임금(주인)이요, 남산이 본향이다'라며 그 고려의 아왕공주를 무조의 신으로 모시는 것에서 상황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조통 장군은 누구인가?

조통은 전남 곡성군 입면 약천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19대 명종 때 뛰어난 학행으로 왕의 부름을 받았다. 그 뒤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신종이 즉위하자, 정 6품인 고공원외랑이 되어 전임 왕의 양위표와 새 왕의 권수청명표를 올리려 금나라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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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의 신임을 얻은 조통은 태자문학을 거쳐 서경유수가 되었다.

1199년에는 장작소감으로 경주의 도적을 소탕하였으며, 이어 진주안무사, 좌간의대부, 국자감대사성 등 요직을 거쳐 한림학사가 되었다.

조통은 초가집에서 검소하게 살며 너그럽고 인자한 성격으로 매사를 잘 처리했다고 한다.

당시 명망 있는 인물들과 어울려 정2품 평장사인 최당 등과 기로회(耆老會)를 가졌고, 오세재, 이인로, 임춘,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과 교우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조통을 일컬어 지상선인, 해좌칠현으로 칭송했다 한다.

이 조통의 해박한 학식과 인품, 늠름한 모습에 반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왕공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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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통을 본 순간, 첫눈에 반한 아왕공주가 시녀에게 물었다.

"저 분이 누구냐?"

"조통 장군입니다."

아왕공주는 조통에게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고백하였다. 이어 부왕을 찾아가 결혼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조통은 이미 처자가 있었다. 아왕공주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조통은 공주 곁을 멀리 떠나기로 했다.

때마침 북쪽 변방이 어지러웠다.

"제가 북변정벌을 하겠습니다."

조통은 왕 앞에 나아가 북변정벌의 장군직을 자원하였다. 그리고 개경을 떠났다.

조통이 북쪽 오랑캐들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어느 날이다. 적의 기습공격에 조통은 많은 군사를 잃고 자신의 왼손이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조통은 군직을 사퇴한 뒤, 불구의 몸을 이끌고 고향인 곡성군 입면 약천리로 낙향하였다.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며 숨어 살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한편 아왕공주는 조통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다, 그의 행방마저도 알 길이 없게 되자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은 날로 깊어갔고 끝내 미치고 말았다.

왕은 아왕공주를 영험한 산신령이 있는 남산으로 보냈다. 아왕공주는 기도와 가무로 산신을 지성껏 섬겼으며, 마침내 효험이 있어 완쾌할 수 있었다.

"내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리라."

아왕공주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한 무속으로 병든 사람들을 돕고 싶어 왕의 허락을 받고 남산을 떠났다. 부왕이 친필로 쓴 '이 도(道)를 받으라'는 글귀를 말머리에 붙이고,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아왕공주를 태운 말은 전주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옥과 고을에 이르렀다. 마침내 더 나아가지 않고 주저앉았다.

"신의 뜻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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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왕공주는 신의 뜻이라 생각하고 기녀 노주선의 집인 노주각에 몸을 의탁했다.

그렇게 남도 각지에 무속을 전하고 가르치던 중이다. 어느 날 공주는 우연히 이곳 옥과가 조통의 고향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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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왕공주는 조통의 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면서 무(巫)의 전수에 힘쓰다가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공주의 죽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왕은 그녀의 슬픈 넋을 애도하며 조통과의 사후 결혼으로 위로를 했다. 또 두 사람의 목상을 옥과의 수호신으로 성황사에 모시라 했고, 제사를 받들 제답 100여 두락까지 내렸다.

그렇게 두 사람의 목상이 대대로 내려오던 중, 16세기에 제작된 목상은 도난을 당했고, 현재의 목상은 고증을 거쳐 다시 만든 것이라 한다.

하지만 목상의 유래나 역사가 무어 중요하겠는가? 면면히 이어지며 힘든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했을, 그 아왕공주와 조통의 사랑의 염원이 앞으로도 힘든 사람들 곁에 가까이 있었으면 한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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