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12>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신창동의 마한 유적中

입력 2018.01.15. 00:00 도철 기자
농업·양잠 등 생산 여건좋아 '큰 정치체' 발전 토대
155㎝나 되는 벼 껍질 압착층은
중국 유적과 비교해도 대단한 규모여서
동북아 최대 벼 생산지였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분석 결과 벼 수확량이
대략 500톤 정도로 당시
제기로 추정되는 토기

며칠 전 광주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영산강 하류에서 상류로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며 고도를 낮추는 항공기에서 바라보니 겨울 가뭄이 심함에도 불구하고 도도히 흐르는 물길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저 물길이 우리 전라도의 동맥이요, 고대 마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스럽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현재의 영산강 모습은 비록 여러 곳에 홍수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지석천 하류 등 일부 지역에서 직강 공사를 해 유로가 바뀌긴 했지만 원래의 형태를 거의 유지하고 있어 옛 모습을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다. 특히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온대수림과 낙엽수림 흔적이 현재의 임상(林相)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영산강을 통해 우리 지역 고대사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다고 믿는다.

논벼와 밭벼가 함께 경작되었다는 사실이 최초로 확인된 신창동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부여의 송국리 유적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지지 않았던 탄화미 흔적을 대규모로 확인해주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이곳에서 확인된 무려 155㎝나 되는 벼 껍질 압착층 두께는, 70㎝ 정도인 중국 허무두 유적과 비교해도 대단한 규모여서 동북아 최대의 벼 생산지였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압착층 면적을 분석한 결과 이 지역의 벼 수확량이 대략 500톤 정도로 추정된다는 연구에서 당시 농업 생산력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영산강 유역의 다른 충적 평야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특히 영산강이 크게 휘감아 도는 곡류 부분 아래에 위치해 있어 넓은 범람원이 형성되어 있었던 신창동 일대는, 강의 상류에서 밀려 내려오는 퇴적물이 쌓여 평지가 되었던 까닭으로 벼농사와 같은 습지성 작물이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비록 목재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괭이, 따비, 굴지구, 낫, 절구통 등은 국내에서 수확과 곡물 가공에 사용된 농기구가 동시에 발견된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농구들이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농사와 관련된 각종 의례가 많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곳에서 출토된 솟대의 일종으로 해석되고 있는 새(鳥) 모양의 목제품은 벼의 수확이나 가공 등과 관련된 수변 의례와 관련된 것이라 한다. 또 출토된 수많은 제기들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항상 5월에 파종을 마치면 귀신에 제사를 지낸다"라고 한 기록을 입증해주고 농경과 관련된 제례 의식이 성행했음을 확인해준다.

#그림1중앙#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단, 삼베 천 조각 역시 면직 기술이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마한인들은 양잠 기술을 알고 있으며, 금·은과 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기록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심지어 평민들도 비단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양잠 산업이 매우 발달하였다는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여하튼 이와 같이 발달한 농업 생산력은 이 지역이 보다 큰 정치체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고고학 자료를 통해 전남 지역을 15개의 세력권으로 구분하였던 전남대 임영진 교수는 영산강 중·상류 지역은 극락강권(광주 동림·평동·하남동)과 영산강 상류권(담양 태목 일대)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두 지역의 취락 실태를 분석한 이영철 박사는 이들 지역에 상당히 규모가 큰 거점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신창동 지역은 그 보다 작은 규모의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이해하였다. 극락강 유역도 AD 2세기부터 5세기까지 대규모 주거 공간과 공동 창고, 70여 기가 넘는 집단 분묘 등이 확인돼 상당한 수준의 정치체의 존재를 짐작하게 한 담양 태목리 유적 수준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특히 태목리 유적의 고분군에 있는 무려 장축 길이가 62m나 되는 거대한 고분은 주매장 시설이 확인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분 규모로 볼 때 피장자의 신분이 연맹장 정도의 세력가가 아니었을까 생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두 세력권을 포함하여 그 사이에 영산강을 따라 불과 10여 km 각기 떨어져 있는 신창동 지역까지를 포함한 웅대한 세력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실제 지형적으로나 거리상으로 볼 때 극락강권과 영산강 상류 지역을 분리하여 보는 것보다는 하나로 아울러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이를테면 신창동 지역을 중심으로 반경 10km가 넘을 정도의 연맹체가 이곳에 성립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신창동 유적지에는 BC 1C∼AD 2C후반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취락 흔적이 구릉 사면에 형성되어 있다. 촌락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근 정치체의 식량 공급 기지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점차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을 가능성도 높다. 금동관이 출토된 나주 신촌리 9호분과 같은 대형 고분이 확인되지 않고 금동관과 같은 위세품 대신 생활도구들만 주로 출토되고 있어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이곳과 불과 1.5km 떨어져 있는 월계동의 거대한 전방후원형 고분을 통해 이러한 추측도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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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63년 출토되어 이른바 '신창동식 옹관'이라 명명되었던 합구식 옹관은 이들 지역에 독자적인 토착 정치 세력이 성장하고 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고 생각된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한반도 서남부에서 처음 발견된 칠기 고배(高杯)를 비롯하여 수많은 칠 관련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대부분 목테를 두른 칠기로, 토기 내부에 옷 칠 수액을 보관한 흔적과 칠이 묻은 천 조각이 바닥에 부착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칠기 제작과 관련된 칠 용기와 나무 주걱을 통해 이곳에 칠기 제작 기술을 소유한 생산 집단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극락강을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칠천(漆川)'이라고 불렀다고 한 것을 보면 이 지역이 일찍부터 칠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수레바퀴통과 바퀴축, 가로걸이 대 등 수레바퀴와 관련된 부속구들의 출토는 수레의 존재를 확인해준다. 다만 이곳에서 바퀴테가 출토되지 않아 그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토된 철경부동촉(鐵莖附銅鏃)이 낙랑계통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낙랑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수레와 어느 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상상이 된다. 필자의 지나친 추측일지 모르지만, 복원된 수레 모양을 보면 농사용보다 세력가들이 순행할 때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작은 토기들도 생활 용품이라기보다는 제기로 믿어지는데, 이 또한 종교 의식을 주관하였던 지배세력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결국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들은 당시 마한인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 지역에 있었던 연맹왕국의 실체를 찾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신창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연맹체가 우세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발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사용된 농기구들이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도 철제 대신 목재로 주로 만들어졌고, 수레 부속 도구들 또한 금속제를 사용한 낙랑과 달리 목재를 이용하여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아직 철기 문화 발달 수준이 미약했음을 알려준다. 이는 당시 이 지역이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생산력 증대를 통한 사회 계층분화를 촉진시키지 못했고,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다른 연맹체를 통합하려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문학박사

신창동식 옹관

1963년 서울대 고고학과 김원룡 교수팀이 처음 조사할 때 발견된 총 53개의 옹관(甕棺)은 30㎝∼50㎝ 크기로 주로 유아나 소아용으로 추정된다. 1개로 된 단옹식과 3개로 된 3옹식을 제외한 나머지 51개는 크고 작은 2개의 옹관을 이어붙인 합구식(合口式)으로 횡치되어 있었다. 이 형식은 대체로 납작한 바닥에 동체의 중하부가 볼록하고 외반구연인 재지 계통의 송국리형 토기와 삼각형점토대 토기의 양쪽에 쇠뿔 모양 손잡이가 달린 고조선 계통의 명사리식 토기가 결합된 독특한 모양이어서 '신창동식 옹관'이라고 부른다. 광주 운남동, 무안 인평 고분군, 함평 당하산·송산 유적지에서 이와 비슷한 형태의 옹관이 출토되고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이와 같이 외부 문화를 독자적으로 재구성한 고유의 특질들이 많이 보이고 있어 토착 정치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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