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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26>해남 윤씨 중흥의 영부(英婦), 광주 이씨 규한록
신혼 사흘만에 남편 보낸 뒤 윤씨 가문 살려 '추앙'
입력시간 : 2018. 01.10. 00:00


윤선도 종택
규한록을 쓴 광주(廣州) 이씨(1804~1863)는 고산 윤선도의 8대 종부이다.

규한록은 광주 이씨 부인이 1834년 3월 4일 보성 대곡(한실, 보성군 조성면)의 친정에서 해남읍 연동리 녹우당의 시어머니께 올린 한글 궁체의 수기체 편지글이다. 200자 원고지 150매 분량으로 그 길이가 13m다.

▲윤선도 유물전시관의 규한록


광주 이씨는 세조와 성종 대의 권신이었던 광원군 이극돈(1435~1503)의 후손이다. 1820년 16세에 해남 윤씨 집안의 24세 종손인 윤광호(1805~1822)와 결혼하였다.

해남 윤씨는 어초은(漁樵隱) 윤효정(1476~1543)으로부터 이어진다.

강진 덕동에 살던 윤효정은 해남의 거족인 해남 정씨의 사위가 되었고, 최부와 유계린에게 학문을 익혔다. 해남읍 연동리에 터를 닦아 가문을 일으켰으며, 선행을 베풀어 덕을 쌓았다.

당시 해남에 한해와 수해가 겹쳐 세곡을 납부하지 못한 주민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윤효정은 3회에 걸쳐 창고를 열어 주민들의 세곡을 대납했으니,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는 이때의 일을 말함이다.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의 주옥같은 시조를 남긴 윤선도(1587~1671)는 윤효정의 4세손이다. 1628년 윤선도는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 되었다. 훗날 효종이 스승인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주었는데, 녹우당의 사랑채는 이 집의 일부를 1668년에 옮겨온 것이다.

윤선도 종택 녹우당 현판


또 조선 최고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윤두서는 윤효정의 7세손이다.

이렇듯 해남 윤씨는 윤효정 이래 조선시대의 인물들을 배출한 학문적, 경제적 명문가였다.

광주 이씨의 부군 윤광호는 윤선도의 8세손이니, 윤효정에게는 12세손이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해남 윤씨 가는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자손도 귀하여 어려움을 겪게 된다.

더욱 불행은 겹친다고 하듯, 광주 이씨의 부군 윤광호는 신행길의 처가에서 돌아오자마자, 병사하고 만다.

당시 결혼식의 신행기간은 50여일 정도였다고 한다. 윤광호는 광주 이씨와 혼례를 올리고 처가로 재행(再行)을 갔으나 종손으로서 제사에 참례하기 위해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병석에 누워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윤광호의 죽음은 윤씨 가의 재산을 탐낸 강진 병영 병마절도사의 매질 때문이라고 한다. 이 후유증으로 윤광호는 병을 얻었고, 죽음에 이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두 부부의 신행기간은 혼례 때의 이틀과 재행 길의 하루를 합해 3일간에 불과했다.

광주 이씨는 남편의 부음을 받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받았다. 기구한 운명 앞에 넋을 잃었다.

'원수의 임오년 설화를 기록하려니 궂은 눈물이 앞을 가리고 속이 믹믹거리니, 천지를 뚫을 듯이 생각해본들 어찌 세상에 머물 뜻이 있겠습니까?'

임오년은 광주 이씨가 시집을 온 해다. 광주 이씨는 규한록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일을 마치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표현하고 있다.

'내 그날 얼굴이라도 한 번 볼 것을, 이태도록 살아오는 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이곳에 시집와 살아온 내 팔자가 하 기구하여 생각하면 할수록 원통하기만 하구나'

신행기간에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애통함도 광주 이씨는 역시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토로하고 있다.

'여자는 여필종부라, 모든 것을 남자의 뜻에 맡겨야 하느니라. 이제 너의 운명은 정해졌다. 나 또한 너를 보고 있으면 비통하고 슬프지만 이제 다시 돌릴 수 없는 것은 어찌하리. 너의 시부모 집안은 조선에서도 몇째 안가는 명문가집안이니 그 댁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제 선조들과 일가들의 낯을 어찌 보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이냐? 네가 정히 살아가기가 힘들다면 절곡을 하여라. 그것이 너와 이 집안을 위한 마지막 길이니라.'

광주 이씨가 남편의 부음을 받고 집을 떠나기 전 아버지가 한 말이다.

남편의 장례를 눈물로 치룬 광주 이씨는 마침내 남편의 죽음을 따라가려고 곡기를 끊었다.

'살고 봐라. 서러워 살다 못 살 거면 자는 듯이 죽는 약을 지어주마, 하시기에 이십 전 아이가 무슨 지각이 있겠사옵니까? 그 말을 곧이 듣고 오히려 든든해서 식물도 먹었습니다. 어머님도 생각 없으시다가 목석에게 인심을 풀고 귀를 틔워주셨습니다. 그제는 친가 어버이 증도에 계신 줄도 알아 자식으로서 차마 불효도 간이 있지 생각되어 뼈에 사무칩니다.'

윤선도 선생


규한록의 기록으로 보면 광주 이씨가 절곡을 멈춘 것은 시숙부 윤민식의 간곡한 만류 때문이었다.

시숙부 윤민식이 광주 이씨에게 '살다가 못살 것 같으면 자는 듯이 죽는 약을 지어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절곡을 멈추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다음날부터 광주 이씨는 음식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숙부 윤민식과 시어머니가 광주 이씨를 간곡히 설득한 것은, 며느리에 대한 어여쁜 마음보다 어떻게든 후손을 잇고자 하는 염원이 더 컸다.

마침내 광주 이씨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해남 윤씨의 후손을 잇는 일에 나섰다. 충남 서천에 윤두서의 후손이 살고 있었다. 광주 이씨는 시어머니와 상의하여 윤두서의 5대손인 윤주흥을 양자로 데려온다.

그러나 그 집에서도 외아들이라, 그저 보내줄 리가 없다. 이 때문에 빚을 지게도 되지만, 이 일은 해남 윤씨 가를 다시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윤주흥이 3남 4녀를 낳고, 선공감의 감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명문사대가의 규범과 예절을 갖추고, 결단력과 슬기로 해남 윤씨 가를 일으킨 광주 이씨는 가문 중흥의 영부(英婦)로 추앙 받으며 '한실 할머니'로 불린다. 그리고 녹우당 뒤 어초은 윤효정 묘역에 묻히는 영광을 얻어, 그 어떤 가혹한 운명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윤선도 유물 전시관


한실 할머니 광주 이씨 묘


최민석        최민석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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