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11>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신창동의 마한 유적上

입력 2017.12.29. 00:00
BC 1세기 영산강 생활상 생생히 보여 준 '타임캡술'
신창동 유적지는
마한 사회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의 하나라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신창동 유적지 원경

마한의 고유한 토착문화는 영산강, 보성강 유역의 안정된 경제 기반이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상호 교류를 통해 공통된 마한 문화의 특질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최근 발굴된 여러 유적·유물들에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조금씩 찾을 수 있다.

영산강 상류 지역에 있는 이른바 '신창동 유적'은 보기 드물게 생활 유적과 고분이 함께 출토된 농경복합유적으로, 기원전 1세기 전후의 마한 사회 모습을 생생히 드러내주고 있어 마한의 '타임캡슐'이라 부르기도 한다.

필자는 역사 문화 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의 작은 언덕을 수시로 올라 연꽃으로 덮여있는 연못을 바라보며 혹시 이 언덕이 인근 월계동의 전방후원분과 같은 그러한 고분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그 시대를 그려보곤 한다.

광주에서 장성으로 넘어가는 국도 1호선, 광주 보건대학 맞은 편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영산강이 곡류하는 해발 25∼30m 정도의 작은 구릉에 위치한 이 유적지는, 1992년 국도 1호선 직선화 공사 과정에서 도작관계 자료들이 쏟아져 인근 3만 8천436㎡ 일대가 사적 375호로 지정되었다.

1960년 옹관이 발견되자 1963년 서울대 고고학과 김원룡교수가 이끄는 발굴팀이 옹관묘 53기를 발굴한 데 이어, 1992년부터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20 여년 넘게 지금까지 18차례에 걸쳐 발굴이 연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림1중앙#

이곳 유적에서 저습지와 환호, 토기 요지, 옹관묘군, 주거지, 밭 등의 유구들이 알려졌고, 구릉 하부에 위치한 저지에서 논의 존재도 확인된 우리나라 대표적인 농경 복합 유적지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마한사에 해당하는 초기 철기 시대부터 원삼국 시기에 이르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마한은 소와 말을 탈 줄 모르며 장례에 써버린다(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라 하였던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과 상반되는 유물 즉, 지름 1m60㎝ 크기의 바퀴통과 바퀴살이 출토되어 말이나 소가 이끄는 수레의 존재 가능성을 높여준 사례가 대표적이다.

기원전 1세기경의 것으로 확인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천 조각으로 알려져 있는 유물이 선사·고대의 베틀 구조를 밝힐 수 있는 방직 도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최근에는 국내 최초로 철기시대에 벼를 재배했던 밭이 발굴돼 육도(陸稻)의 가능성을 확인해 주었다.

이처럼 신창동 유적지는 우리나라 '최고',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돼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필자가 이 유적지를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수식어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리적으로 영산강이 곡류하는 상류 구릉 지대에 위치해 있고, 인근 월계동 전방후원분과 비교적 가깝게 위치하여 있어 마한 연맹왕국의 실체와 영산강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변 국가와의 경제·문화적 교류의 구체적인 모습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창동 유적지는 마한 사회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의 하나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에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역사 시간에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에 밭농사가 시작되고,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벼농사가 나타났다고 학습하였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78년 나주 다시면 가흥리 영산강 유역 습지에서 채집한 화분을 탄소 측정 연대로 살핀 결과 지금부터 35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벼가 재배되었다는 흔적이 나와 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물론 관련 고고학적 유물이 동반되지 않은 것이 한계지만, 탄화미가 출토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도작 문화 유적지라 여겨졌던 경기도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국리보다 시기가 이른 신석기 후기에 영산강 유역에서 도작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음이 확인된 셈이다.

말하자면 가흥리보다 더 이른 시기에 벼가 재배된 곳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지금부터 6000년 경 시작된 벼농사가 영산강 유역에서 3500여 년 경에 재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되어도 좋을 것이다.

즉, 비슷한 화분 검사법을 통해 조사된 같은 한반도 남부 지역인 김해 예안리나 울산 방어진 지역의 벼농사 재배 시기가 각각 지금부터 3000∼2000년, 2300년경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나주 다시 가흥리 사례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반도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이해가 설득력이 있다면 벼의 전파 경로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동안 벼농사의 전파 경로에 대해 요동반도를 거쳐 북쪽으로부터 들어왔다는 북방설과 화남이나 동남아에서 우리나라 남부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설, 그리고 두 설을 절충하는 절충설이 있었다.

만약 영산강 유역에서 우리나라 도작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남방설이 보다 설득력이 있지 않나 한다. 남방설을 비판하는 주된 근거가 당시 항해술로 볼 때 양쯔강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왔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지만 나타난 현상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벼농사 발달 조건이 충분한 영산강 유역은 밭농사보다 벼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높았을 것이다. 1992년 신창동의 저습지 유적 토층에서 벼 생산력 내용과 발전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무려 155cm 두께의 벼 껍질 압착층이 확인돼 벼 재배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각종 토기뿐만 아니라 목기, 칠기, 목제 낫과 괭이 등의 농기구, 심지어 현악기와 비슷한 악기류 등 생활 용품도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밭 유적이 확인됐는데, 토양을 분석한 결과 벼 재배가 확인됐다.

국립광주박물관장을 지낸 조현종 박사는 저구릉 사면에 계단으로 형성돼 있는 이 곳에서 밭벼 재배 사실의 확인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해발 20m의 영산강 범람원에 의해 형성된 배후 습지와 구릉 하부의 저지가 연접한 곳에서 논 유적이 1998년 발굴에서 확인됐다. 이 유적에는 점토대토기 단계의 토기 파편과 탄화미 등도 섞여 있었다. 이처럼 논과 밭에서 재배된 벼농사가 당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을까?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다량의 목재·낫 유물에서 대략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는 철제 농기구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임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낫 사용은 수확방법이 개선되고 재배 면적이 확대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이 시기에 괄목할만한 종자 개량이나 단위 면적 당 수확량이 증가하는 등 재배 기술이 발달했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신창동 유적에서 검출된 벼 껍질 층에서 채취한 토양 샘플을 분석한 결과 상당수 벼에서 개화 후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아직 여물지 않은 쭉정이가 다량 발생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농구 등의 발달과 함께 벼 재배기술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 기후 현상에서 비롯되는 자연 재해 내지는 저습 답에서 발생하기 쉬운 뿌리가 썩는(根腐) 현상 등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AD1∼2세기에 한반도에 닥친 냉해와 재배 기술의 한계 때문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농기구의 발달을 통해 농경이 가능한 지역에 대한 벌채와 개간이 이루어져 농경지가 확대됨으로써 쌀 생산량이 늘었을 것은 분명하다.

한편 도작 농경 비중이 점차 커져갔다고 하더라도 쌀이 식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볼 수는 없다.

도작 농업이 발달했다고 하는 일본 야요이 시대의 쌀 생산량은 휴경지 비중과 미숙미의 비율이 높아 당시 1년 식량 소비량의 3.3개월분에 불과하였다는 연구는 참고 된다. 말하자면 당시 밭작물의 비중이 상당했던 우리나라의 경우를 고려할 때 도작 농업에서 생산되는 비중이 우리가 기대한 만큼 많은 편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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