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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24>상추 씻는 처녀, 양도내기
대기근 겪는 고향 나주에 수천 석 구휼미 보내
마치 선녀 같아
자랄수록 양도내기는 예뻐졌다
총각들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도내기샘 처자가 얼마나 예쁠까
호기심에 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리따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입력시간 : 2017. 12.13. 00:00


양도내기가 살던 영산포 택촌 마을
나주시 택촌은 조선조 초 조창인 영산창이 있던 곳이다. 5~6백석의 곡식을 싣는 조운선 53척이 소속되었다. 조창은 1512년(중종7)에 영광 법성창으로 이전해갔지만, 수많은 어선, 사선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양도내기는 조선 말엽 1821년에 그 포구마을 택촌에서 태어났다.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양도내기의 출생을 예언한 일화가 있다.

1821년 이서구가 전라도 관찰사로 전주에 있을 때다. 어느 날 하늘의 별을 살펴보던 이서구가 하인을 불러 '내가 추수법으로 괘(卦)를 벌여보니 나주 이방의 집에 역적이 태어났다. 남자거든 죽이고 여자거든 내버려둬라.'고 했다.

나주 금성관


하인이 다녀와 여자여서 그대로 두고 왔다고 하자, 이서구는 '그 아이가 커서 국권을 흔들 거다.'라고 했다.

도내기는 건축용어다. 창틀 위쪽의 홈통을 창짝보다 더 깊이 파낸 고랑을 말한다. 그런 지형의 도내기샘은 포구를 찾는 사람, 배들의 귀한 식수원이었다.

"마치 선녀 같아."

영산포 택촌마을 도내기샘


자랄수록 양도내기는 예뻐졌다. 배시시 웃거나, 활짝 웃거나 누구든 그녀의 하얀 이를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순간 아득해졌다.

동네 총각들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아름다움은 입소문을 탔다. 인근 마을 총각들이 눈 마실을 왔다. 인근 마을 뿐만이 아니었다.

택촌 마을은 교통의 요지였다. 어선, 장삿배가 하루에 수십 척 들락거리니 오고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들의 입소문으로, '도대체 도내기샘 처자가 얼마나 예쁠까?' 호기심에 오는 사람도 있었다.

처자의 이름은 자연스레 양도내기가 되었고, 아리따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양도내기가 도내기샘으로 물 긷고, 빨래하고, 채소 씻으러 나올 시각에 맞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노래까지 생겼다.

'나주영산 도내기샘에 상추 씻는 저 처녀야/ 상출랑을 씻거들랑 속에 속잎은 네가 먹고/ 쭉대길랑 나를 주면은 동지섣달 긴긴밤에/ 쭉대기값은 내가 허리/ 에∼헤야 에헤야∼ 에∼헤야 에헤야∼'

양도내기는 어릴 적부터 노래와 춤을 잘 췄다. 회갑잔치, 무당 살풀이, 단오 굿을 보고나면 그대로 따라했다. 가히 천부적 소질이었다.

영산포 택촌마을 도내기샘


당시 시대는 혼란스러웠다. 1811년 북쪽에서 홍경래 민중봉기가 있었다. 남쪽도 과도한 세금, 부역, 군포 등으로 농민들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결불여나주(結不如羅州)', 세금을 거둬들일 곳은 나주만한 곳이 없다 했다. 하지만 풍수해와 역병이 창궐하던 시절,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몸에서 짜내는 기름이 세금이었다.

1821년 전염병이 호서지방에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탐관들의 수탈에 겹쳐 유랑민이 늘었고, 아사자가 속출했다.

양도내기 10살 무렵이다. 나주목 아전들이 세곡을 빼돌린 혐의로 옥에 갇혔다. 양도내기 아버지도 연루가 되었다. 심한 문초를 받다 죽었다. 엎친데 겹친다고 어머니도 역병에 걸려 세상을 떴다.

하루아침에 소녀 가장이 된 양도내기를 이끌어준 사람이 있었다. 택촌 포구에서 주막집을 하는 여주인이었다. 나주목 퇴기출신인 그녀는 평소에 양도내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양도내기는 정식으로 춤과 노래, 악기를 배웠다. 그야말로 나는 새에게 날개를 하나 더 달아준 것처럼 일취월장이었다. 택촌 포구의 주막집은 날로 번창이었다.

그러던 때에 한양에서 나주 목사의 친구가 내려왔다. 양도내기를 만났고, 그녀의 소문은 한양까지 퍼졌다.

20살 때다. 양도내기는 한양으로 갔다. 김좌근의 부름으로 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종의 상납이었다.

김좌근은 1797년,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 김조순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뒤늦게 40세에야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됐다. 하지만 1840년 형 김유근이 중풍으로 죽은 뒤, 자고 일어나면 벼슬이 달랐다.

1841년 양도내기를 만나던 해에만도 1월 1일 이조참판, 1월 8일 공조판서, 1월 16일 병조판서였다.

하루는 김좌근이 집에 돌아와 양도내기에게 물었다.

나주 금성관 내 김좌근 영세불망비


"사람들이 자네를 나합 마님이라며 온갖 재물을 바친다니 기분 좋은가?"

"영감님! 원통합니다. 그들이 저를 희롱하려고 나주 나(羅)에 조개 합(蛤)을 붙여 나주조개라 합니다. 저를 말로써 욕보이는 거지요."

양도내기는 재치가 있었고 배짱도 컸다. 1862년이다. 나주가 대기근으로 허덕였다. 이때에 수천석의 곡식이 한양에서 왔다. 양도내기가 구휼미를 보낸 것이다.

나주 금성관에 '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가 세워진 내력이다.

1866년 고종의 수렴천정을 하던 신정왕후가 양도내기를 불러 호통을 쳤다.

"너는 천한 기녀임에도 김좌근의 총애를 받아 치부를 했다. 또 김좌근이 다른 여자를 봤다고 뺨까지 쳤다. 더욱 정일품 정승만이 받는 합하 칭호를 쓰는 것은 임금을 욕보이는 일이다. 5일의 말미를 줄 테니, 고향으로 가거라."

이에 69세의 김좌근은 머리를 싸매고 청수동 별장에 들어가 병 아닌 병을 앓았다. 양도내기 앞에서 엉엉 대성통곡을 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해결사로 나섰다.

"김 대감! 신정왕후 일은 내가 해결하겠소. 대신 재황의 결혼 비용 십 만량, 경복궁 재건 비용 십 만량을 내겠소. 어떻소?"

김좌근 아버지 김조순 상


재황은 고종의 이름이다. 이 거래가 성사됐음은 물론이다.

"영감, 사랑채 때문에, 내 집에서 남산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오."

양도내기의 말에 김좌근은 종로구 교동 본가의 사랑채 기둥을 잘랐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1869년 김좌근은 죽었다. 그런데 양도내기가 언제 죽었는지의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이제 이 땅의 일들이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이는 하늘에서 양도내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저 상상만할 뿐이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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