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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23>인헌왕후, 능성 구씨
입력 : 2017년 12월 01일(금) 00:00


따뜻한 성품에 비단옷 걸치지 않은 왕의 어머니
선조는 정원군의 가례를 치르려고
사대부 집 딸들을 모아 친히 간선하였다
두 차례 간선에 짝을 찾지 못했으나
계운궁을 한 번 보고 마음에 들었다
선조와 인빈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고
10월 3일에 혼례를 치렀다
경기도 남양주시 인헌왕후 능성 구씨 장릉
능성 구씨의 시조는 구존유다. 고려 고종 18년인 1231년이다. 몽골의 침략으로 경주 황룡사 탑이 불타고, 광주 무등산이 위험했다. 이때에 화순 너릿재를 방어막으로 서남쪽 고을을 지켜낸 분이 벽상삼한삼중대광검교상장군 구존유다. 화순군 한천면 정리마을에 능성 구씨 시조 단소가 있게 된 연유다.

조선 선조 11년인 1578년 5월 23일(음력 4월 17일)이다. 인헌왕후 능성 구씨(1578~1626)는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구사맹과 어머니 평산부부인 신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구사맹(1531~1604)은 1549년 진사시,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7년 전쟁 중이던 1597년(선조 30년) 의정부 우참찬으로 왕자를 호종하였고, 1604년 음력 4월 1일 판의금부사로 있던 중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졸기에 '천성이 담백하고 조용하였으며, 검소한 것을 좋아하여 땅이나 집을 장만하지 않고 오로지 문장을 즐겼다' 했다.



어머니 신씨는 7년 전쟁의 용장 신립의 누이였다.

인헌왕후 능성 구씨는 궁호가 계운궁이다.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발로된 것이라 한다. 계운궁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효성과 우애도 깊었다.

4세에 예로 몸가짐을 바로 했고, 5세가 되자 의연하기가 성인과 같았다.

어느 날이다. 음식을 먹다 몇 수저 뜨더니 숟가락을 놓았다.

"왜 그러느냐?"

부모가 까닭을 물었더니 배가 부르다 하였다. 그런데 밥상을 물리며 보니, 음식에 오물이 섞여 있었다 한다.

또 어느 날 부모가 어쩌나 보려고 장난감을 다른 형제에게만 주고 계운궁에게는 주지 않았다. 허나 개운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에 부모가 계운궁을 쓰다듬으며 "내 딸은 진짜 딸이다. 다음에 반드시 우리 가문을 빛낼 것이다."하였다.

선조와 인빈 사이에 태어난 왕자가 정원군이다. 선조는 정원군을 기국이 있다고 여겨 사랑하였다.

계운궁이 12세 되던 1590년이다. 선조는 정원군의 가례를 치르려고 사대부 집 딸들을 모두 대궐로 모이게 하고 친히 간선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 간선을 하고도 맞는 짝을 찾지 못했으나, 계운궁을 한 번 보고는 금방 마음에 들었다. 선조와 인빈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고, 10월 3일에 혼례를 치렀다.

선조는 여사관에게 명하여 계운궁에게 소학 등 여러 서적을 가르치게 하였다. 계운궁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글의 뜻을 깨달아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성품 또한 따스하고 인자한 가운데 말이 적었다.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높은 이는 높은 이대로 낮은 이는 낮은 이대로 맞게 행동하니, 모두들 계운궁을 더욱 공경하였다.

계운궁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1595년 을미년이다. 계운궁은 첫 왕자를 낳았다. 능양대군 종(倧)으로 훗날 인조다. 둘째 왕자는 능원대군(1598) 보, 셋째 왕자는 능창군(1599) 전(佺)이다. 딸은 맨 끝에 낳았다.

능창군은 어머니인 계운궁을 닮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외모도 훤칠했다. 궁마술에도 능해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독서를 좋아했고, 그래서 별칭이 현(賢)공자였다.

능창군 역시 능성 구씨 집안 처녀와 결혼(1615년 음력 3월)하였으나, 8월 22일 광해군은 능창군을 역모 혐의로 친히 국문하였다. 곧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었는데, 11월 17일 열여섯의 나이에 스스로 목매 자진하였다.

세상이 험하니 속으로 삭였지만, 자식의 죽음을 보는 어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하지 않아도 훤하다. 계운궁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고 말았다.



하지만 계운궁은 한 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솔들에게 덕과 인정으로 너그럽게 대하고, 남의 일을 보살피는데 가난하고 천한 이부터 먼저 하였다. 친속 중에도 참화가 자신에게 미칠까봐 발길을 끊은 이가 있었지만, 말이나 얼굴을 처음과 똑같이 하였다.

부군 정원군의 뜻도 고운 얼굴로 받들었다. 그럼에도 정원군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에 눕고 말았다. 이때에 계운궁은 몸소 약을 달이고 의복을 세탁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마침내 정원군이 세상을 뜨자 물 한 모금 입에 넣지 않고 울부짖다 졸도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치도록 미음으로 연명하였다.

혹시 병이 들어 주위에서 푸닥거리를 권해도 웃으며 말했다.

'비는 것이 헛된 일이라면 애당초 말아야 할 것이고, 응험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미망인인데 빌어 무엇을 할 것인가?'

계운궁은 이렇듯 사리에 밝아 현혹됨이 없었다.



어느 날이다. 꿈에 선조가 계운궁을 불러 말하였다.

'너희 집에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를 자가 있을 것이다.' 하며 옥새를 주었다. 또 이르기를 '이것을 특별히 그에게 주고 나의 가르친 말을 전하라.' 했다.

계운궁이 절하고 묻기를 '신정(新政)에 최선을 다하면 이 나라를 진압하고 창성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였다.

이러한 현몽이 현실이 되었다. 1623년(광해군 15) 광해군은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강화로 유배를 갔다. 이어 계운궁의 맏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인조다.

계운궁은 이때에도 가지고 있던 재물을 모두 꺼내 대업달성을 도왔으며, 이듬해 봄 역적 이괄이 한양도성에 육박해왔을 때도 두려움에 떠는 이들을 무마하여 변란진압에 공을 세웠다.

한 평생 화사한 비단옷을 몸에 걸치지 않고 검소한 생활로 일관하던 계운궁은 인조 4년인 1626년 지병의 악화로 경덕궁 회상전에서 세상을 하직하니, 48세였다.

1632년 인조는 모후인 인헌 왕후 구씨의 성향(姓鄕)이라 하여 능주를 목으로 승격하였으니, 능주는 곧 능성 구씨 계운궁의 본향으로 역사의 빛이 되었다.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