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8>일본 대중 불교의 화신(化身), 행기(行基)下

입력 2017.11.30. 00:00
'금압령' 등 국가탄압에도 멈추지 않은 구제활동
행기스님은 금압령에 맞서지 않은 채
오로지 중생구제 활동에 매진했다
10여곳의 구제 시설 '원'을 비롯해
저수지와 작은 개울, 다리 등
민중들의 삶에 직접 도움을 주는
시설들을 적극적으로 만든다
동대사 대불

지난 17일 국립 나주 박물관에서 신촌리 금동관 발굴 100년을 기념하는 학술 심포지움이 열렸다. 심포지엄에서는 금동관의 성격을 둘러싸고 영산강 재지 수장설과 백제 왕실 사여설이 팽팽히 맞섰다. 필자가 며칠 전 열린 '왕인박사 현창 사업의 현황과 과제'라는 세미나에서 강조했지만, 1959년 이병도 박사가 주장한 369년 근초고왕 때 전남 지역이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학설에서 벗어나 자료를 새롭게 읽어내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난 호에 행기스님이 수많은 중생 구제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시 율령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는 것을 살폈다. 하지만 722년 율령정부가 "비래(比來:요즘) 승니들이 계율을 연마하지 않고 천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감언을 퍼트리며" 라는 표현을 쓰며 재차 승니령을 내리는 것에서 스님의 구제활동이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불과 5년 전인 717년 승니령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718년 대화국에 융복원(隆福院), 720년 하내국에 석응원(石凝院) 등 구제 시설이 잇달아 세워졌다. 행기 스님에게는 유식론에서 강조하는 중생 구제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금압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국가의 탄압을 받으면서까지 행기 스님이 십 수 년에 걸쳐 행한 중생 구제활동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고, 마을을 지나면 어린이들까지 달려 나와 '행기 스님이 오셨다'고 환호하고 앞 다투어 참배를 하려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특히 "행기大德이 난파의 강을 뚫어 나루터를 만들었는데 법설로 감화시키니 도속귀천(道俗貴賤)을 막론하고 모두 참여하였다"는 '영이기(靈異記)'의 내용에서 '승속일체(僧俗一體)'된 스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행기스님이 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더욱 세력을 확장해가자 스님 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나온 2차 승니령은 1차 때보다는 현저히 약화되어 있었다.

한편 행기스님은 금압령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은 채 오로지 중생구제 활동에만 매진하였다. 723년 청정토원·청정니원, 구수원원 등 구제시설을 잇달아 건립하는 등 729년까지 10여 곳 이상 되는 곳에 세워진 구제 시설 '원'을 비롯하여 저수지 15개소, 구거(溝渠작은 개울) 9개소, 교량 6개소 등 민중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시설들을 적극적으로 만든 데서 알 수 있다. 특히 1천여 명에 이르는 제자집단을 이끌고 중생구제에 헌신하였던 스님의 행동은 "스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리를 만들고 보를 쌓는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달려와 힘을 보태니 불과 며칠 만에 완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보았다"는 '속일본기'의 기록처럼 일반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당시 행기 스님이 가졌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대야사(大野寺) 토탑' 건립을 들 수 있다. 727년에 건립된 이 탑은 동변 54m, 서변 54.6m, 남변59m, 북변56.4m, 높이 9m, 13층으로 축조된 거대한 탑으로 조탑에 참여한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금압령 아래에서도 이러한 거대한 탑을 세운 행기 스님의 힘에 압도된 율령정부는 마침내 731년 "행기법사를 따르는 우파한·우파이들의 법을 수행하는 자로서, 남자는 61세 이상, 여자는 55세 이상은 출가를 허락한다"라고 하여 행기 스님의 존재를 공식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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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율령정부의 태도가 변하게 된 것은 스님의 세력을 경계하였던 후지하라 후히토가 720년 사망한데다 724년 즉위한 쇼무천황은 승려들을 궁으로 불러 암송회를 여는 등 적극적인 불교 정책을 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722년 100만 정보의 개간 계획을 발표하며 농지의 사유를 인정하는 三世一身法(723)을 만들어 경작지 확대에 총력을 기울였던 율령정부로서는 토탑 건설에서 확인한 바처럼 노동력 동원 능력이 있는 행기 스님의 도움이 절실하였을 것이다. 이는 금압령이 해제된 이듬해 시작된 유명한 '협산지(狹山池)' 댐 개수사업을 스님과 그 집단이 본격 뛰어들어 추진하였던 데서 알 수 있다.

행기스님에 의해 처음 개수되어 1천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협산지는 최근까지도 나라(奈良) 지역에 관개용수를 공급하여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 유명한 댐이다. 이 개수사업은 행기스님이 가졌던 토목 기술과 농민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역량 때문에 가능하였다. 댐 밑에 세워져 있는 '협산지 박물관'에 있는 댐의 단면 모형은, 스님이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잘 쌓아 두툼하게 하여 흙벽을 튼튼하게 한 이른바 부엽공법(敷葉工法)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물을 가로 막아 댐(Dam)식의 커다란 저수지를 만드는데 사용된 이 공법은 백제로부터 유입된 고도의 토목기술이었다.

이처럼 백제식 공법의 사용은 행기 스님이 도래인 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스님이 이 지역의 도래계 호족들의 재정적 후원과 일반 도래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엄청난 규모의 개수 사업이 가능하였다. 스님은 이 댐을 개수할 때 당연히 농업용수를 이용할 수많은 도래인들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협산지 개수 사업은 행기스님의 가장 빛나는 중생 구제 활동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집권 초기부터 천연두의 대유행, 대기근에다 장옥왕의 반란 등 정치적 혼란이 연이어 일어나 일본 고대사에서 말하고 있는 '혼란과 격동의 시기'에 재위하였던 쇼무(聖武)천황은 이 난국을 불교의 힘을 빌어 극복하려 하였다. 하내 지역의 '지식사'라는 절에서 민간이 자발적으로 만든 '노사나불'을 보며 민간의 기술력과 부를 동원한 大佛 주조를 구상하였던 쇼무천황은, 743년 대불 조영 발원 조칙과 寺地 개토식에 이어 745년 행기스님을 '대승정(大僧正)'으로 삼아 이 사업을 총괄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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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기스님에게 대불 조영사업을 맡긴 까닭은, 대불을 조영할 재정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쇼무천황으로서는 지식사 노사나불 조영처럼 민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천 명이 넘는 집단과 생활하며 무슨 일이든지 '며칠 내에 이루어내는'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힘과 그 지역 도래계 호족들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스님이 주목되었던 것이다. 이 비로자나불 '大佛'을 주조한 조불장관 '국중연공마려'의 조부가 백제 멸망 당시 일본에 망명한 백제인이었고, 대불 조성에 막대한 경비를 부담한 경복 또한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 후손이었다는 점이 이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 경복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금광을 개발하여 엄청난 부를 일구었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든 도래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었던 행기스님은 앞장 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대불 조성사업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행기 스님이 '대승정'직을 받아들이며 '대불'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은 불교계의 위상을 강화하고 중생 구제의 이상을 실천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 불교사학자인 타무라(田村圓澄) 교수가 대불 조영이 행기 스님에게 있어 쇼무천황 개인의 부처가 아니라 일반인들의 부처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대불 사업에 도래인 및 백제 망명인들의 모든 역량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백제 멸망 후 점차 약화되고 있는 도래인과 백제 망명인들의 지위를 높이려는 행기 스님의 의도가 있었다. 말하자면 오늘날 일본 불교의 상징이 되고 있는 도다이지(東大寺) 비로사나불 대불 조영에는 도래인들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스님의 간절함이 깃들어 있다. 행기 스님 사후에 도래인들의 정체성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752년 완성된 대불을 보지 못한 채 749년 행기스님은 입적했지만, '僧俗一體'를 실현한 그의 삶은, 왕인박사 후예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도래인들과 함께 한 오랜 체험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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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산지(狹山池)와 行基

도래인들은 일찍부터 제방을 쌓고 저수지를 만드는 기술을 본국에서 가져와 고대 일본의 농업 발달에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5세기 인덕천황 때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제방을 쌓은 자전제(茨田堤)로, 그 흔적과 기념비가 사적으로 남아 있다. 7세기 초 축조된 오사카부 사야마(狹山)시에 위치한 관개용 저수지인 '사야마이케(狹山池)'는 둘레 약 3㎞, 면적 약 36㏊에 달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댐식 저수지인데, 732년에 이루어진 첫 개수 작업을 행기스님이 백제식 토목기술인 부엽공법을 사용하여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1400년의 역사가 쌓여있는 제방, 송수관, 제방의 미끄럼을 방지하는 목재틀 등 댐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곳에 '협산지박물관'이 세워져 행기 스님 관련 자료와 댐 축조 방법 등을 자세히 안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행기와 협산지(行基と狹山池)'라는 특별전을 개최하여 행기스님과 협산지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문학박사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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