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22>흑룡동의 여장부, 장화왕후 나주 오씨

입력 2017.11.15. 00:00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한답니다, 약도 없지요"
전 군인은 싫어요
오다련의 딸은 고개를 저은 뒤
집 아래 샘으로 나갔다
목 마르오. 물 한 바가지 주오
무지개를 따라온 왕건이었다
물바가지를 주면서 오다련의 딸은
나주시 장화왕후 오씨 유적비

894년 무렵이다. 고려 건국의 어머니 장화왕후가 나주(목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오부돈, 아버지는 오다련, 어머니는 연덕교였다.

오다련은 딸이 태어났다는 소리에 며칠 전의 태몽이 생각났다. 황룡이 영산강(금강)에서 그대로 집으로 올라왔던 꿈이었다.

"용이다. 용!"

"용이라니요?"

마침 지나가던 하인이 어리둥절 휘둘러보았다.

"참 기이한 일이다. 암용이 우리 집으로 날아왔다."

"그런데 용이 암컷인지 어찌 아시는지요?"

"만물은 다 암수가 있다. 암용은 뿔끝이 가늘다. 코가 똑바르고 갈기는 부드러우며 비늘도 얇다. 꼬리가 펑퍼짐하고 뭉툭하니라. 그런데 암용의 발톱이 다섯 개였다. 오조룡(五爪龍)? 왕의 기상 아닌가? 그렇다면…."

오다련은 입을 다물었다. 오늘 태어난 딸과 암용의 모습이 겹쳐져서다.

당시 나주는 금성, 영산강은 금강, 금성포구(나주 영강동)는 목포라고 불렀다. 오다련은 이곳에서 수십 척의 배를 부리는 무역상단의 우두머리였다. 집안 대대로 이어져온 상단이었다.

어수선한 세상이었다. 900년에 견훤이 완산주(전주)에 후백제를 세웠다. 오다련과 그의 장인 사간 연위, 금성태수 나총례 등은 금성(나주)의 안전을 위해 견훤에게 군량미와 해산물, 군마, 군포 등을 상납했다.

#그림1중앙#

그러던 중 903년 태봉국의 왕건(877~943)이 나주에 왔다. 왕건의 아버지는 왕륭이다. 왕륭은 예성강 상단의 우두머리였다. 궁예가 세력을 떨치자, 왕륭은 송악에 궁궐을 지어 궁예에게 바치고 자신은 금성태수(김화, 창도, 철원), 아들 왕건은 송악태수가 되게 했다. 그러나 왕륭은 897년에 죽었고, 898년 궁예는 송악에서 후고구려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 왕륭의 아들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오다련을 찾아온 것이다. 이에 오다련은 견훤에게 한 것처럼 왕건에게도 군량미와 해산물, 군마, 군포 등을 상납했다. 더하여 영광 항화도항과 함평 손불의 군유산에 군사 전진기지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영암 신북의 여석산은 질 좋은 숫돌이 나는 곳이었다. 숫돌은 병사들의 전투필수품이었다. 오다련은 이 숫돌까지 상납했다.

#그림2중앙#

909년이다. 왕건이 다시 나주에 왔다. 해군대장군이 되어 전함 70여척, 2천500여 수병을 이끌고 진도와 고이도 등 신안의 뭍섬들을 점령한 뒤, 무안 몽탄에 진을 쳤다.

910년이다. 견훤 군사의 수륙협공을 물리치고 왕건은 몽탄 파군교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견훤을 지지하는 호족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왕건은 주변의 저항세력을 하나하나 무찌르면서, 30여척의 전선을 더 건조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이다. 왕건은 전투 훈련을 마치고 포구에 배를 댔다. 문득 눈앞 언덕에 소나기도 지나가지 않았는데 아름다운 무지개가 걸쳐있었다.

왕건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하여 언덕 쪽으로 갔다.

지난밤이다. 오다련의 딸이 아버지처럼 용꿈을 꾸었다. 영산강에서 황룡이 올라와 품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꿈 이야기를 어머니께 했고, 아버지 오다련에게도 알려졌다. 오다련은 자신의 용꿈 태몽이 생각나서, 딸에게 물었다.

#그림3중앙#

"왕건을 어찌 생각하느냐?"

"전 군인은 싫어요."

오다련의 딸은 군인이 싫다고 고개를 저은 뒤, 집 아래 샘으로 나갔다.

"목이 마르오. 물 한 바가지 주오."

무지개를 따라온 왕건이었다. 왕건에게 물바가지를 주면서 오다련의 딸은 버들잎을 몇 잎 훑어 띄웠다.

"이보우! 왜 버들잎을 물에 띄운 거요?"

"급히 마시면 체한답니다. 물에 체하면 약도 없지요."

순간 왕건의 눈에 현기증이 일었다. 오다련의 딸이 무지개가 되었다. 그리고 눈에서 마음으로 들어와 깊숙이 걸렸다.

왕건은 곧장 오다련을 만났다. 청혼을 했고 16살 나주 오씨는 고려 건국의 어머니가 되었다. 2년 뒤인 912년 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무'라 했다.

이 해에 왕건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무'의 백일잔치에 술을 많이 마셨다. 잠에 곯아떨어졌는데, 소란한 소리에 잠을 깼다. 사방이 불바다였다. 더욱 눈앞에 칼을 치켜든 괴한이 있었다.

그 순간이다. 비명을 지르며 괴한이 쓰려졌다. 또 방으로 들어서던 두어 명의 괴한도 머리를 감싸 쥐며 고꾸라졌다. 머리맡에 있던 왕건의 칼을 잽싸게 휘두른 건 나주 오씨였다. 그날 '무'는 뺨에 화상을 입었지만 왕건은 무사했다.

이날 왕건이 머물고 있는 오다련의 집을 야습한 무리는 신안 압해현의 호족 능창 무리였다. 능창은 수중전투를 잘해 수달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왕건은 부하를 이끌고 뒤를 쫓았다. 나주 반남현 갈초도 나루에서 역시 야습으로 이들을 일망타진하였다.

913년 왕건은 태봉국 최고의 벼슬인 시중에 올랐다. 918년 궁예를 축출하고 철원 포정전에서 왕으로 즉위하며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나주 오씨도 아들 '무'를 데리고 즉위식에 참석 장화왕후가 되었고, 아버지도 다련군에 올랐다.

919년 왕건은 송악으로 도성을 옮겼다. 이 무렵 태자책봉문제로 말이 많았다. 장화왕후는 '무'를 태자로 삼아줄 것을 왕건에게 요구했다.

왕건은 낡은 무명옷을 곤룡포로 싼 뒤 상자에 넣어 장화왕후에게 주었다. 장화왕후는 이 상자를 정 1품 대광 박술희에게 보였다. 박술희는 왕건의 뜻을 알아채고 '무'의 태자 책봉에 앞장섰고, 921년 '무'는 태자가 되었다.

#그림4중앙#

934년이다. 안타깝게도 장화왕후는 '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936년 왕건은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였고 943년 세상을 떴다. 태자 '무'는 고려 2대 왕 혜종이 되었다.

945년 혜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병사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장화왕후와 함께 고려 건국의 주인공, 영산강의 무지개로 걸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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