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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진의 새로 쓰는 남도의 문학과 문화 <15>글 쓰는 이순신 장군과 남도 걷기
"문화시대, 세계 유산 '난중일기' 재조명 하자"
망가진 몸으로 전장에 복귀한다
그러나 곧장 우수영으로 가지 않고
전라도를 두루두루 거쳐서 내려온다
원균의 무리한 전투로
수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의 고향은 대부분 전라도였다
입력시간 : 2017. 11.13. 00:00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난중일기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명량대첩 후에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이다. 이 말을 오늘날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은 정치이다. '호남이 곧 국가'라고 확대 해석을 하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이다. 당시 현실적으로 호남은 왜적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에 해당했다. 한국전쟁 때였다면 '부산이 곧 국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나는 이 말에서 이순신 장군이 마음 깊이에서 보내는 호남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읽고 싶다. 이순신 장군은 옥고를 치르며 망가진 몸으로 전장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곧장 우수영으로 향하지 않고 전라도를 두루두루 거쳐서 내려온다.

선조의 전투 종용과 그것을 끝내 견뎌내지 못한 원균의 무리한 전투로 100여 척에 달하는 판옥선이 파괴되었다. 전투가 접근전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어서 수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돌아간 곳은 고향일 것이고 그 고향의 대부분은 전라도였다.

이렇게 이순신은 자신의 건재를 호남인들에게 각인시키면서 동시에 흩어진 수군들을 모았다. 이순신이 보성의 한 지역을 지날 때 지역민들은 곳간을 탈탈 털어 긁어모은 곡식을 군량미로 내어준다. 이때 얻은 그 땅의 이름이 보성의 '득량(得糧)'이다.

이런 마음들이 모여서 일궈낸 기적 같은 승전이 명량대첩이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이 말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또 하나의 어머니 호남인에 바치는, 가장 깊은 마음에서 솟구치는 진심어린 시의 언어다.



◆난중일기

남도는 이순신이 태어난 곳도 아니고 최후를 맞은 곳도 아니다. 굳이 생사의 인연으로 따지면 한 겨울 여수에 당도한 그의 주검이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이 남도 땅이라는 것은 있다. 그의 주검은 충민사에서 사흘을 나고 고향땅을 향했다. 그러나 그의 주검은 쉽게 남도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가는 곳마다 남도인은 그의 주검을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거듭되는 노제로 두 달여가 지나서야 그의 죽음은 남도를 벗어나 충남 아산을 향할 수 있었다. '전남의 전설'에는 여수'충민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1598년 11월 19일 이락포 앞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그 시신은 1차로 수영인 여수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1일에야 장례가 치러졌다. 그러므로 이장군의 시신은 장례 일까지 여러 곳을 거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노제가 거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 첫 노제가 여수에서 있었을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때 장군을 모시던 자운과 옥형이 이 충무공이 우수영에 계실 때 자주 오르내리고 즐겨 마시던 석천(石泉) 곁에 위패를 모시고 3년 상을 지냈다는 것이다.(金井昊편, 충민사, 전남의 전설, 전라남도, 1987)



민족적 측면에서 이순신 장군의 최대의 업적은 왜군으로부터 조선을 지켜낸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 가장 큰 업적은 '난중일기'다. 이 사적 기록은 우리의 국보일 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유산이기도 하다. 제 아무리 뛰어난 문학가라고 하더라도 이루어내기 힘든 일이다. 나는 이 점을 남도는 가장 소중하게 품어야 할 것이다. 그 난중일기에 기록된 날씨와 기후, 그리고 마음 대부분이 남도의 것이다. 이것을 나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자 자랑으로 생각한다.

충민사


◆땅이름과 이순신 장군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은 주로 아버지에게 맡겨진다. 땅의 이름을 좇아 이전을 탐색하는 학문은 지명학이나 지명인류학이 담당한다. 그런데 땅 이름 중에서는 그 내력이 명확한 것이 있다. 그 땅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에 해당하는 이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남도에는 이순신 장군과의 인연을 끝내 간직하고 싶은 욕망이 땅이름으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 몇 곳만 소개한다.

돌산대교에서 바라본 종고산


◆여수 돌산의 무술목

1598년 8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병에게 철군이 지시됐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순천 해룡에서 농성 중이었다. 퇴로는 충무공과 명나라 원병이 차단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각지에 머물던 일본 패잔병들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 모여들었다. 종의지, 평주신 등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뚫으려는 작전을 펴기 위해 돌산 서해안쪽에 나타났다. 이들은 조명연합수군이 쫓자 돌산도의 북쪽 해안 우두리 중간목 굴전이 부산 쪽으로 통하는 해협으로 잘못 알고 항해해 갔다. 그러나 육지에 막힌 것이다. 이를 뒤늦게 알고 돌아 나오다 500여 척의 선단 중 450여 척이 함몰당했다. 이후부터 이 짧은 목을 대승을 거둔 무술년의 이름을 따 무술목이라 했다.

돌산대교에서 바라본 종고산


◆진도 만금산 '강강술래터'

울둘목의 녹진등대 뒷산을 만금산이라 하고 이 산의 남쪽에 있는 부봉의 정지를 '강강술래터'라 하는 전설이 있다. 만금산의 주봉은 80m이고 부봉은 60m 내외인데 부봉 정상을 중심으로 울둘목 쪽은 토성, 반대편은 석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토성의 길이는 500m 가량으로 성 주위를 강강술래를 하며 도는 것을 벽파쪽 바다에서 바라볼 때 사람이 한없이 행진하는 것처럼 보여 이를 충무공이 이용했다는 것이다. 일본 강점기 때도 이곳만은 국유림으로 남겨 두었고, 인근 주민들은 성역으로 취급했다. 그들은 소를 먹이러 가도 소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곳에 소가 들어가면 죽게 된다는 타부를 스스로가 만들었다.

◆순천시 해룡면 양미산(糧米山)

순천시 해룡면에 앵무산(鸚鵡山, 348m)이 있다. 이 산은 양미산이라고도 한다. 군사들과 백성들을 시켜 주위가 30리나 되는 앵무산을 마람(이엉)으로 덮어서 군량미를 쌓아놓은 노적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왜병들은 이 노적봉을 보고 우리 군사들의 군량미가 든든함으로 보고 근반에 접근하지 못했다. 그 뒤부터 이 산을 양미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목포 유달산 노적봉에도 비슷한 전설이 전해 온다.

◆여수시 덕양마을 역의암

마을에서 100여m의 거리에 해발 160m의 동산이 있다. 이 산 기슭에 역의암이란 바위가 있다. 높이 10m 가량의 이 바위에서 이순신 장군은 병졸들에게 옷을 갈아 입히는 위병술을 썼다고 전해온다. 역의암에 많은 종류의 옥을 모아놓아 눈이 부시게 했다. 병사들로 하여금 산을 돌며 색이 다른 옷을 번갈아 입게 했다. 적은 수의 병사로 같은 동작으로 반복해 많은 수의 병사로 보이게 했던 것이다. 덕양 앞에는 고막등이라는 해발 50m 내외의 동산이 있다. 이 동산에는 이순신 장군이 마람(이엉)을 덮어 군량미(軍糧米)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고 하여 '노적봉'이라고도 부른다.

울둘목 진도대교


◆여수의 종고산

임진왜란 당시 이 산에서는 국난을 알리는 울림이 세 번씩이나 있었다. 해발 219m의 이 산은 충무공이 한산대첩을 거두던 날 은은한 종소리도 같고 북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연 3일간이나 계속 들렸다. 수영(水營)에 돌아온 충무공이 이 소식을 듣고 '종고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1822년(순조 22년)의 큰 가뭄 때 주민들이 종고산과 구봉산 상봉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는데 3일 만에 흡족한 비가 내려 대풍을 이뤘다 한다.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주민들은 종고산과 구봉산 아래 이듬해 정월 초하룻날 저녁에 다섯 사람의 제관을 뽑아 산제를 모셨다.

◆이순신 '남도 루트'와 글쓰는 이순신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남도 도처에 깃들어 있다. 이것을 잘 발굴하고 정리하면 여러 자락의 이순신 루트를 남도에 마련해 시민들에게, 세계인에게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루트의 주제는 '호국 되새기'가 아니라 '이순신 따라 글쓰기'가 되어야 우리 시대에 어울리고 또 세계인과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것은 한 시대, 한 민족의 일이다. 물론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그의 전략, 기적과 같은 승리는 세계 해전사에 남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시대에 그것은 우리를 흡족케 하는 '무용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힘은 '전략전술'이 아니라 '성찰의 힘'에서 나온 것이다. 8년 전란 중에 쓴 난중일기는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세계인에게도 위대한 유산이 되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동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큰 칼을 옆에 찬' 광화문의 동상이 아니었으면 한다. 여수는 장군으로서 이순신이 가장 오래 머물던 곳이다.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난중일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이 이곳에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진남관 근처에서는 '큰 칼' 대신 붓을 들고 '난중일기'를 쓰고 있는 충무공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문학박사·시인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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