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채 박사의 신 육상 실크로드

문병채 박사의 신 육상실크로드 <13>우리 민족 옛 터전, '천산(天山)'을 가다

입력 2017.11.10. 00:00
풍요로운 초원에 생명수 공급원… 오아시스 만들어
7천m 구름 속 암봉으로 솟아 있어
신비감에 싸여 있는 산이다
주변 골짜기는 산맥에서 가장 큰
거대한 빙하로 덮여 있다
그 옆으로 옛 실크로드가 놓여 있다
신장지역과 이리를 잇는 통행로다
천산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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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산산맥에 오르다

천산산맥은 '실크로드의 어머니'이다. 북쪽의 비구름을 막아주고, 비와 눈을 뿌려 생명수를 공급해 줬다. 풍요로운 초원을 만들었다. 많은 오아시스 도시가 생기게 했다. 중국 서부 신장자치구에서 키르기스스탄까지 뻗은 산맥이다. 타림분징하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경계를 이룬다.

천산이란 범상치 않은 이름에서 느껴지듯, 전설처럼 장엄한 산맥이다. 하늘을 탐한다. 정령이 깃든 산답게, 세찬 눈보라에도 하늘을 지키고 있다. 원래 저 산은 흉노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동안 잊어왔으나, 두르고 있는 흰 눈 속에 잊었던 옛 이야기를 담고 있으리라. 먼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인연을 끊고 있는 사이, 변방국들은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천산은 늘 거기 있었지만 말이다. 전쟁과 험난한 역사로 간혹 산이 운다. 근거 없는 역사이야기를 쉽게 이야기 하는…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다. 역사는 깊이를 재보지 않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보이는 껍질이 아닌, 숨어 있는 속살을 보고 싶어 나는 여기에 왔다. 유창한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말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우리 민족에겐 고향이 없다. 아니 조국이 없다. 국적조차 모호하다.

알마티의 저녁! 장엄하게 벌개 지는 석양에 민족의 터전이 어둠에 묻혀 든다. 석양은 지평선 끝에 닿지도 않고 장엄하게 벌개 지는데, 눈만 들면 보이는 천산의 뭇 봉우리들이 더욱 도드라진다. 돌아오는 길에 한텡그리봉 유화 한 점을 사가지고 왔다. 기념으로 여기기 위해서다.

한텡그리봉은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의 국경에 위치한다. "한텡그리"란 '천신의 왕이 지배하는 곳'이란 의미다. 우리 말로는 '큰-단군'에 가깝다. 어떤 이는 좀 비약해서 배달산(백악산)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산과 멀지 않는 곳에 "아사달, 신시" 등이 있었을 것이라 한다.

7천m에 이르는 높은 산일뿐만 아니라 항상 구름 속에 암봉으로 솟아 있어 신비감에 싸여 있는 산이다. 그 산의 전경사진은 항상 천산산맥을 대표한다. 주변 골짜기는 천산산맥에서 가장 큰 거대한 빙하로 덮여 있다. 길이는 59km에 이른다. 그 옆으로 옛 실크로드가 놓여 있다. 중국 신장지역과 이리(伊梨)를 잇는 통행로다. 길 중간에 무자터(木札特) 빙하가 가로막고 있어, 기어올라 두꺼운 눈 언덕을 지나야 한다. 험한 길이다. 일찍이 당나라 현장법사(618~907)가 이 길을 넘고 그 험난함을 기술하기도 했다. 천산의 발치에 앉았다. 아무 것도 맺지 못한 흰 꽃들이 발 아래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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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크로드는 없었다

실크로드는 없다. 넘어 온 길은 거기서 멈춰 있었다. 양 떼 사이로 난 작은 길은 수풀로 덮여 있다. 그 길마저 얼마 안가 찾을 수도 없었었다. 대신 옆길로 자동차 다니는 대로가 놓여 있다.

막힌 산은 뚫고, 하천은 가로지르며 시원하게 놓여 있었으나, 옛 이야기는 없는 밋밋한 길이다. 길이 갈린다. 나무 가지에 헝겊이 매달려 있다. 까마득한 옛날엔 저 평원이 해저였다. 마른 땅에서도 잎을 달고 숲이 되길 원했지만 요원하다. 자라는 만큼 잘려나가고 죽어간다.

산자락이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 아니 사막이다. 사막의 길로 가고 있다. 목마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다. 해갈할 수 없는 세계를 만나고 싶다. 이 길을 넘는 옛 대상들을 만나고 싶다. 새들이 북쪽으로 나라간다. 새들은 미련을 만들지 않는가 보다 가야 할 곳이 있는지, 만나야 한 가족이 있는지. 아니면 푸른 초원이 있는지….

"흉노"로 대별되는 국가가 있었던 곳, 우리 역사에 여러 형태로 영향을 미쳤던 국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이 땅과 관계 깊은 나라, 그래서 나는 그들 역사와 문화에 호기심이 갔다. 그래서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이들 국가는 천산산맥을 무대로 삼았다. 유목민인 그들이 가장 탐내던 기름진 초원지대 땅이 펼쳐졌기 때문 이었다. 이들은 지금도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계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뭉치고 분열을 거듭하면서 여러 왕조를 탄생시켰다. 세계사 책에 등장하는 흉노(훈족), 돌궐(투르크), 선비, 몽골 등도 따지고 보면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른 이름에 불과하다. 초원에서 삶을 이어 가는 사람들은 늘 그대로였다.

울과 펠트, 모피로 만들어진 전통복이 멋지다. 행사나 의식 복인 화려한 실크 복도 멋지다. 근대화로 다른 섬유 옷들도 많이 입고 있으나 옛 것이 더 멋지다. 이들 문화의 상징인 전통 모자(ak-kalpak)를 쓰고 다닌 사람도 많이 보인다. 검정색 장식과 추상적인 곡선 모양의 스티치가 일품이다. 모자 꼭대기에 있는 검정색 술 장식을 한 하얀 돔 모양은 언제 봐도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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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토베 언덕에 오르다

황량한 벌판에 버려진 고려인들! 그들이 최초로 버려지고 정착했던 곳이 '바스토베 언덕'이었다. 지금도 서 있는 '정착비'가 힘든 역사를 대변해 준다. 인근 '우슈토베 역'은 지금도 화물을 실어 나르고 있다. 갈대숲을 지나 언덕에 오른다.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이지만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경사면을 바람막이로 삼아 토굴을 파고, 주변의 갈대를 엮어 지붕을 이어 추위를 피했던 곳이다. 참혹한 삶이 생생하게 배어 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두더지처럼 거처를 만들어 삶을 이어갔다.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기도 했고, 그리고 고향을 아니 조국을 그리워하며 죽어갔다. 그들은 이제 눈물도 싫어했다. 그리고 죽지 않은 사람은 장군도 되고 영웅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이 공동묘지로 변해 있다. 많은 고려인이 이곳에 묻혔다. 묘비의 한글명이 선명하다. 노동영웅이란 묘지도 보인다. 당시 여타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노동영웅을 배출했다고 한다. 고려인들의 노동력과 농업기술이 뛰어났음을 알게 한다.

그들은 학교부터 지었다고 한다. 언덕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코쉬카르바예프 학교가 그것이다. 고려인 선생님이 복도에 전시된 80년 학교의 역사를 설명해 줬다. 교육열 강한 그들의 정열을 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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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마을 풍경을 담다

고려인들의 집성촌은 해체된 지 오래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대도시나 외국으로 떠났다. 노인들만이 농사를 짓고 살아간다. 고려인! 그들에겐 조국이 없다. 아니 없어져 버렸다. 기차에 실려 도착지도 모른 채 뿌려진 곳. 폭서와 혹한만이 반복되는 곳, 아직도 그들은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인근에는 우슈토베 마을이 있다. 오늘따라 햇볕이 강렬하다. 공기가 맑은 탓일 것이다. 지평선만 보이는 곳에 마을이 있다. 떴다 하면, 바다가 보이는 한반도 땅이 좁게 느껴진다. 민족의 고향과 진배없지만, 낯설게만 느껴진다. 땅 때문이 아니라, 낯선 사람 때문일 것이다. 역광을 받으며 젊은 여자가 창가에 서 있다. 윈도우에 가려졌지만 얼굴이 낯익다. 옷매무새와 자태도 낯익다. 멋 우리 선조의 후손이 아닐까.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우리 한국인의 얼굴이다. 바라보며 멋쩍게 웃는다. 서로 닮은 것에 대한 반가움이다. 모두가 정겹고 친숙하다. 고향에 대한 강한 향수가 오버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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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범도 장군을 만나다

크질오르다, 이 곳은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곳이다. 무려 3만5천여 명이 이주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 수도인 알마티에서 1천100km가 넘는 곳이다. 아니 오히려 우주베키스탄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가까운 곳이다. '붉은 도시'라는 뜻을 지닐 만큼 사막도시다. 카자흐스탄의 초기 수도이기도 했다. 이 곳은 고려인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도시다. 고려인들이 세운 고등교육기관인 대학과 극장이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한인사회를 이룩한 제3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노동영웅도 32명이나 탄생했다고 한다. 또한 애국지사들의 활약 장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홍범도 장군이다. 그는 1920년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인물이다.

시내에 있는 장군의 묘역을 찾았다. '통일문'이라 쓰인 입구를 들어가니, 장군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 있고, 흉상이 건립되어 있다. 흉상 왼쪽에는 1937년 강제 이주의 아픔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무리를 이끌고 민족을 구하고자 했다. 그것이 대장부의 삶이거늘…, 지금은 그가 지나온 기록만이 이렇게 남아 있다.

시내에는 홍범도 거리가 있고, 고려극장도 있었다. 모든 공연은 한국어로 한다고 한다.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문화와 정체성을 알리려는 열정'이었다. 중앙아시아에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고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해왔음을 알게 했다.

아시아문화지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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