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4>일본 고대 사상의 鼻祖(비조), 마한인 王仁 博士中

입력 2017.09.29. 00:00
일본서 출토된 '영산강식 토기'로 영암 출신 추론

미국의 유명한 스미소니언 박물관 유물들이 밤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가상하여 제작된 '박물관은 살아 있다'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 영화처럼 문화 유적을 단순 전시를 뛰어넘어 스토리텔링하여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해 VR(가상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9월 22일부터 나주 복암리 고분 전시관에서 2005년 영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古인골 가운데 비교적 형태가 온전한 남성, 여성, 어린이 등 3명을 디지털 홀로그램으로 복원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본보 9월21일자 '약수터' 소개) 인문학적 상상력이 요구되는 고대 문화 복원은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인 4차 산업 혁명의 주요 아젠다가 될 것이다.

지난 호에 왕인 박사 영암 출신설은 이미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고 살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도왜 사실 자체까지 부정하려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그것도 이 지역 학자가 먼저 주장하고 타 지역 학자가 가세하여 뜨거운 논란이 되었다. 그들은 6세기 초 중국 양나라 주흥사가 처음 만들었던 '천자문'을 5세기 초 왕인이 도왜할 때 가지고 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왕인의 존재는 애초에 없었을 뿐 아니라, 6세기 왜에서 활동했던 백제계 왕진이(王辰爾) 이야기가 일본서기 등에 왕인으로 윤색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왕인 이야기가 강조되었던 것은 일선 동조론 때문이고, 지금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일선동조론 부활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천자문은, 주흥사 이전에 이미 위나라 종요가 펴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왕인이 가져간 천자문은 당연히 종요가 찬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천자문을 가지고 왕인 도왜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왕진이는 6세기 전후에 도왜하여 왕인과 1세기 이상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한시집이라고 알려져 있는 '회풍조 서(懷風藻 序)'에 "왕인이 응신천왕 때 몽매함을 가루시마(輕島)에서 깨우쳐주는 것을 시작하였고, 왕진이는 민달천왕 때 대화 지역에서 가르치는 것을 마무리하였다"라고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일인이 아님이 분명하다. 실제 왕인은 書(西)文씨의 시조, 왕진이는 선(船)·진(津)·갈정(葛井)씨의 시조로 구분이 되고 있고, 씨사(氏寺)도 왕인은 서림사·화이신사인 반면, 왕진이는 야중사·등정사 등으로 달라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단지 1세기 늦게 건너 온 왕진이가 왕인 후예들이 거주하였던 오사카 古市에 정착하여 훗날 사람들이 약간 혼동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나중에 건너온 왕진이 일족이 먼저 온 왕인 계보로 거짓 꾸미는 분위기가 8세기말 약간 보이는데 이를 일부 학자들이 혼동한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 '신찬성씨록'을 보면 中河內 지역에 도래인 씨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앞서 살핀 '유공광구소호', '조족문 토기', '승석문토기'와 같은 대표적인 영산강식 토기들이 하내 지역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는 것과 연관 지어 보면, 그곳 도래인들 상당수가 영산 지중해 출신이었다고 생각된다. 왕인 박사가 '하내 文首氏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고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왕인과 그 후예들이 가와찌(河內)에 많이 정착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보면 왕인 박사는 가와찌 지역에 있는 영산 지중해 출신 도래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나아가 #그림1중앙#

그들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추론은 왕인 박사가 영산 지중해 출신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으로, 구림 일대에 고려 중기까지도 남아 있었던 왕인 박사 구전 얘기가 역사적 사실의 반영임이 확고해진다.

한편, 당시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가야·왜·대마도·오끼섬 항로를 영산 지중해 사람들은 거의 이용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대마도나 오끼 섬에서 지석묘와 같은 한반도계 유물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큐슈 지역의 고도(五島) 열도에서는 지석묘가 다수 발견되고 전형적인 영산강식 유공광구소호까지 출토되었다. 이는 이곳이 당시 영산 지중해 지역과 왜의 규슈 지역을 연결하는 중간 거점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말하자면 영산 지중해- 고흥반도·여수 금오도·고토열도·아리아께 해를 거치는 항로가 두 지역을 연결하는 항로였다고 믿어진다. 특히 고도 열도에 현재도 남아 있는 '와니가와(鰐川)', '기슈쿠쵸(鬼宿町)', '오니다께(鬼岳)' 와 같은 지명은 왕인 박사와 절대적으로 연관이 있어 보인다는 학술원 회원 박광순 교수님의 교시는 이러한 추론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말하자면 왕인 박사 일행도 이 항로를 이용하여 왜로 건너갔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여하튼 왕인 박사가 유학과 천자문에 정통했다면 적어도 4세기말 영산 지중해 일대에 유학, 불교 등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좌가 된다. 기원 전후부터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졌던 이곳에 유교, 불교와 같은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구려가 372년 소수림왕 때 불교를 공인하고 유학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였으며, 백제가 384년 침류왕 때 불교를 공인한 일을 생각하면, 비슷한 시기 영산 지중해 연안에도 이러한 문화들이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누차 얘기했지만 이 지역은 외부 문화에 대한 수용도가 높은 편이어서, 토착적 전통이 강했던 신라처럼 새로운 문화 유입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한 마라난타가 법성포로 들어와 불갑사와 나주 불회사를 세웠다는 창건 설화는 주목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를 동국대 김복순 교수는 침류왕이 사망하자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법성포에 왔던 마란난타가 전남의 여러 곳을 다녔던 흔적이라고 하였다. 법성포 또는 영산강 하구를 통해 들어온 마라난타가 영산 지중해 일대를 다니며 포교 활동을 하다 백제 서울 한성으로 간 것인지, 김교수의 주장처럼 백제에 들른 후 이곳에 와 포교 활동을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곳 영산강 유역에 유독 마라난타가 절(寺)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이 지역에 일찍부터 새로운 사상들이 유입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여겨진다.

여기에 풍요로운 경제 기반이 더해진 영산 지중해 일대는 학문이 발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왕인 박사와 같은 대학자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최근 목간이 발견된 인덕천왕 즉위식에서 왕인이 노래했다는 '나니와(難波津の歌)'는 일본 최초의 정형시인 '와카(和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왕인 박사가 '書'·'文' 성씨의 시조라는 점과 그 후예들이 "대대로 직업을 계승하여 사관이 되거나 박사가 되었다"라는 기록에서 대학자의 풍모를 느끼게 된다. 게다가 그 후예들이 일본 고대 불교 사상 형성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는 井上光貞의 논증은 왕인 박사의 역사적 위치를 새삼 깨닫게 한다. 따라서 도래인이었지만 일본 역사 교과서에 그의 활동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사기', '속일본기', '일본서기' 등 일본 사서에 왕인 박사가 '마한인' 이 아닌 '백제인'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역사서들이 편찬된 8세기에는 마한이 백제에 편입된 지 이백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왕인의 출자가 백제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역사서는 물론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왕인 박사가 영산 지중해 지역 출신 마한인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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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五島)열도 출토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

고도열도는 일본 구주 서북단의 장기현 서쪽 해상에 위치한 열도로 복강도(福江島)·구하도(久賀島)·나류도(奈留島)·약송도(若松島)·중통도(中通島) 등 5개의 큰 섬 및 그 외 약 140개의 유,무인도로 이루어져있다. 지정학적으로 오도는 고대부터 한반도와 중국대륙으로의 해상교통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며, 왜구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40년대 후반 중통도 한 유적지에서 유공광구소호가 출토되어 현재 그곳 경빈관(鯨賓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국의 유공광구소호는 충남 이남의 마한권, 가야권, 신라권에서 모두 출토되지만 영산강 유역이 중심지이고 전북 고창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토열도 유공광구소호는 영암 만수리 4호분, 광주 향등 3호 주거지 등 5세기 전반기 그것과 상통하는 것으로 영산강 유역에서 제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결국 이 토기를 통해 당시 고토열도와 영산강 유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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