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1>영산강 유역 재지(在地) 세력과 '장고분(長鼓墳)'上

입력 2017.08.18. 00:00
'임나일본부' 아닌 주변국과 문물 교류 반증
'장고분'의 출현은 두 지역의
문물 교류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을 조선 정복설의 근거로 삼거나
일본의 억측에 대한 피해 의식에서
역사적 실상과
광주 월계동 장고분

'고대사Ⅱ'를 시작하며

오랜 세월동안 우리 지역의 자연 환경과 역사적 상황이 쌓여 형성되었던 전라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무등일보는, 그동안 소홀히 취급된 우리 지역 고대사를 찾아보려 하였다.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Ⅰ'에서는 마한 시대에 大國을 형성했던 우리 지역 연맹왕국의 실체를 추적하였다. 마한 남부 연맹 맹주 '침미다례'와 영산 지중해의 대국 '내비리국',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득량만 대국 '초리국', 남부 내륙 지역을 지배했던 보성강 유역의 '비리국', 그리고 전남 동부 지역의 '불사분사국' 등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주요 연맹왕국을 발굴하였다. 이들은 강한 분립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독자적인 문화에 백제, 가야, 왜 등 외부문화를 용해시킨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백제가 세력을 팽창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4세기 후반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에 들어갔다는 기존의 통설은 입론의 근거가 없다고 하겠다.

최근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언급과 관련하여 무등일보는 마한사 연구와 복원 사업을 국정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특집으로 다룬 바 있다. 이제 '고대사Ⅱ'를 새롭게 기획하여 실체가 드러난 우리 지역의 마한 남부 연맹왕국의 활동 내용을 찾아보려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양직공도, 일본서기와 같은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 등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엮으면 3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우리 지역 연맹체들이 중국, 일본, 백제, 가야 등과 교류를 하며 발전을 도모했던 모습들이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우리 지역의 마한사가 새롭게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몇 년 전 (사)왕인박사현창협회의 도움으로 오사카 부립 치카츠아스카(近つ飛鳥) 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다. 일본 고대 문화 발달에 영향을 준 마한인의 발자취를 찾기 위함이었다. 우리에게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타다오가 설계한 것으로 더 알려져 있는 이 박물관은, 인근에 있는 '大王墓'라고 불리는 거대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들이 밀집되어 있는 百舌鳥·古市고분군에 위치해 있다. 길이가 486m에 달하는 거대한 대선릉(大仙陵)을 보며 과연 고분이 맞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보며 규모는 그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와 유사한 고분들이 광주 월계동, 해남 반도 등 영산강 유역 여러 곳에 집중되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필자의 뇌리를 맴돌던 화두가 되었다. 양 지역의 문물 교류 및 정치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 일본의 문화 발달에 백제가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통설로 되어 있다. 현재 일본의 한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가 4세기 후반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인 것처럼, 고대 일본과 백제는 문물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일본에서 출토된 많은 한반도계 유물들을 분석한 경북대 박천수 교수는, 3세기부터 5세기까지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의 중심은 가야이고, 백제와의 교류는 6세기 초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필자 또한 백제와 왜의 관계가 기존 이해처럼 매우 긴밀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한 남부 연맹을 이끌었던 '침미다례'와 '내비리국' 등이 반도 서남부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제가 서남해 연안항로를 통해 왜와 자유롭게 교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동안 인식되고 있었던 양국 관계를 #그림1중앙#

다른 관점에서 살펴야 하지 않을까 한다. 4세기 후반에 전남 남해안 일대가 백제의 지배에 들어갔다는 기존 인식과 달리 5세기까지도 이 지역 연맹왕국들이 마한 남부 연맹을 형성하며 독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백제와 왜'가 아닌 '마한 남부 연맹체와 왜' 로 바꾸어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발굴·조사된 유적과 유물에서 영산강 유역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는 것은 한, 일 양국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이를테면 니시신마치(西新町)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들, 이른바 평행 타날문 토기를 비롯하여 이중구연호, 양이부호 등이 영산강식 토기였다. 물론 장란형 토기나 주구 토기처럼 또 다른 영산강 유역의 주요한 기종들은 출토되지 않고 있어, 당시 왜가 토기 기종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 지역의 주요 토기들이 일본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영산강 유역 토기 편년에 대해 학자들 간에 견해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3세기 중엽∼4세기 중엽으로 살피고 있다. 또한 니시신마치 유적에서 출토된 부뚜막 역시 영산강 유역과 비슷한 장방형의 평면 형태를 띠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말(馬)뼈가 원형 그대로 출토된 시토미야키타 유적에서 발굴된 U자형 부뚜막 또한 전라도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이처럼 近畿 지역에서 출토되는 한반도계 유물 가운데 영산강 유역과 관련이 깊은 유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영산강 유역 문화가 이 지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게 한다.

반면 백제 중심지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은 점이 특이한데, 이는 당시 백제와 왜의 교류가 영산강 유역 연맹 왕국에 밀려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을 반영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림2중앙#

한편,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 가운데 왜계 요소가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국보 295호로 지정되어 더 유명해진 반남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누차 언급하였듯이, 보주가 달린 3단의 가지 장식에서 가야계 요소와 더불어 왜계 요소도 있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같은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인 '하니와' 또한 재지적인 특징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영산강 유역에서 왜계 요소가 보이고, 일본에도 영산강 지역 문화 요소가 보이는 것은 두 지역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말해준다. 영산 지중해 연안의 남해만 일대에 아직도 남아 있는 수문포·당두포·배나루 등의 고대 지명을 통해 그곳 포구들이 과거 마한 연맹 왕국 시절 대외교역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대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점술인 '복골' 유물이 남해만의 수문 패총과 함께 해남 군곡리 패총, 광주 신창동 유적 등 영산강 유역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다. 해남 군곡리가 낙랑과 가야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 중심지였다면, 영산강 내해인 내동천 유역과 수문포 등 삼포강 유역의 여러 포구들이 영산강 뱃길로 영산강 중·상류 즉 광주 신창동 일대까지 연결해주는 관문 역할을 한 셈이다.

여하튼 4세기 후반 오사카 분지를 중심으로 야마토 왕권을 성립시켰던 왜 왕조와 영산강 유역의 '내비리국' 등이 인적, 물적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별고로 다룰 예정이지만, 영암 상대포에서 출발했다는 왕인 박사 일행의 도왜(渡倭)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의 연맹왕국들은 주변국과 활발한 문물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시종·반남 일대의 거대한 옹관고분도 교류를 통해 가야나 왜의 거대 고분의 실상을 알게 된 내비리국 등 영산강 유역의 재지 세력들이 그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영한 것이었다. 실제 '大王墓'라 불리는 거대 전방후원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百舌鳥·古市 고분군이 있는 곳이 중국 대륙과 조선반도로부터 들어오는 입구인 오사카만과 정치 중심지인 나라 분지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외국 사신들에게 왜 왕조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거대 고분을 축조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연맹체들도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신촌리 9호분 같은 고총(高塚)의 옹관고분을 조영하였고, 일본의 거대 고총인 '전방후원분'에도 주목을 하였던 것은 아닌가 한다. 전방후원분, 즉 영산강 유역 장고분들이 倭와 유사한 측면도 엿보이지만 재지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어, 재지 세력들이 마냥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입장에서 채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광주 월계동 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분이 잇달아 발견되자 이 지역이 '임나일본부' 관할 아래 있었다는 과거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큰 관심을 가졌다. 반면, 한국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와 관련되는 것을 우려하여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오히려 한반도에서 넘어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방후원분 문제는 한·일 양국 사이의 현재적 상황과 관련하여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3세기 후반에 나타나 6세기까지 유행하였던 고분이고,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도 그것과 유사한 측면도 적지 않다. 말하자면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의 출현은 어디까지나 두 지역의 문물 교류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을 조선 반도 정복설의 근거로 삼거나, 반대로 일본의 억측에 대한 피해 의식에서 역사적 실상과 동 떨어진 해석을 하는 것 모두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음호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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