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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진의 새로 쓰는 남도의 문학과 문화 <9>벌교(筏橋)에서 만나는 역사와 사람 그리고 문학
입력 : 2017년 08월 14일(월) 00:00


"흔들릴 때 흔들려야 버틸 수 있는 세월도 있다"
홍교 전에는 뗏목으로 건너 다녔다
벌교는 뗏목으로 놓은 다리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이름을 이곳 벌교가 선점했다
홍교에서 바다 로 500여m 내려오면
부용교를 만날 수 있다
소화다리
◆벌교 가는 길

첫 기차여행이었다. 막 뛰기 시작하는 쌍둥이 아들과 한 살 아래 셋째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부모님과 나서는 첫 기차여행이었다. 능주역에서 벌교행 기차에 올랐을 때, 부산스럽게 예약한 것을 후회했다. 우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비켜달라고 말하기가 어색할 정도로 기차는 한산했다.

농촌에서 자란 우리 또래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잘 모른다. 시골에서 사내가 자기 아이를 안거나 태나게 귀애하는 것은 '흉'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농사가 바쁜 철이면 개에게도 호미를 쥐여줄 정도로 일손은 늘 부족했다. 영(令)이 서지 않으면 농사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아버지는 아이들까지도 부릴 수 있어야 했다. 자신의 사랑을 곧이곧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편이 집안의 안녕을 위해서는 더 나았을지 모른다. 흔들리는 기차에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 아이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3년 쯤 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거기서 3년이 흘러 다시 벌교를 찾았다.













◆벌교 홍교

벌교는 벌교천을 사이에 두고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동편에는 버스 정류장이 자리하고, 서편에는 벌교역이 있다. 두 지역은 가깝지만 먼 곳이다. 흘러내리는 물로만 보면 벌교천은 징검다리로도 건널 수 있을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밀물이다. 만조의 밀물은 벌교천을 가득 채운다. 폭풍우 치는 만조의 바닷물은 사납기 이를 데 없다. 이 밀물을 견뎌낼 수 있는 다리를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벌교에 다리가 세워진 것은 1729년으로 알려져 있다. 보물 제304호로 지정된 '홍교(虹橋)'는 영조 5년 선암사의 승려 초안과 습성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는 영조 13년(1737)과 헌종 10년(1844)에 고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지금의 홍교는 1985년에 보수 복원한 것이다.

홍교가 놓이기 전에는 뗏목으로 다리를 놓아 건너 다녔다. 벌교(筏橋)는 뗏목으로 놓은 다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여러 지역에 벌교가 놓여 있었다는 말이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이름을 이곳 벌교가 선점·독점했다.



◆소화다리

홍교에서 바다 쪽으로 500여m 정도 내려오면 부용교를 만날 수 있다. 제1부용교라고 부르는 이 다리는 '소화다리'라고 오랫동안 불렸다. 일제강점기 소화6년(1931년)에 만들어져서 '소화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낡은 다리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흔적을 지니고 있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 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태맥산맥 1권 66쪽)



소설 '태백산맥'을 쓰기 위해 조정래는 많은 취재를 했다. 이 소설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무당 '소화'의 이름은 아마도 이 다리에서 얻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일제강점기 일본 왕의 연호인 '소화'를 지우고 그 자리에 미영 꽃만큼 흰 이름인 '소화'를 앉혀 놓고 있다. 역사와는 무관하게 '소화다리'를 걷는 사람들은 '태백산맥'의 소화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무당 소화와 정하섭의 테마는 한국전쟁의 본질적인 성격을 비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정하섭이 제석산 줄기를 따라 회정리 소화의 집으로 숨어들 때 소화의 어미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병이 깊었다. 말도 운신도 할 수 없는 그녀의 눈으로 장지문을 열고 들어오는 정하섭이 들어온다.

그녀의 눈은 형언할 수 없는 문장을 담고 분노하듯, 저주하듯, 체념하듯 반짝인다. 정하섭은 정참봉의 손자이고, 소화는 정참봉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비극성을 '근친상간'이라는 비윤리성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은 아닌가 짐작해 본다.







◆부용교

소화다리에서 아래쪽으로 300m 가량 내려와서 만나게 되는 다리가 미리내교다. 사람들만 건널 수 있는 다리다. 다시 250m 가량 아래에는 비교적 최근에 놓인 부용교가 있다. 현재 벌교 사람들이나 벌교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다리다.

부용교의 이름은 벌교읍에 자리한 부용산에서 왔다. 부용산은 산세보다는 노래로 더 유명하다. 1947년 박기동 시인은 스물넷 여동생을 폐결핵으로 잃고 부용산에 묻는다. 돌아오는 길에 누이를 보내는 시를 짓는다.

부용산 오리 길에 /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노래 '부용산' 1절)



당시 박기동은 목포항도여중(목포여고)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함께 근무하고 있던 음악교사 안성현이 이 시에 노래를 붙였다. 그리고 가사와 곡이 어울린 이 노래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의도치 않게 빨치산들의 노래가 되면서 박기동은 오랜 세월 가시밭길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 파란만장의 삶이 오늘 부용교를 지나며 듣는 노래 '부용산'을 더 짙게 해 준다.



◆철다리

부용교에서 바로 철다리를 볼 수 있다. 이 다리를 건너 기차는 순천으로 향한다. 1930년 경전선 철도가 놓이면서 건설되었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대표적인 악인의 한 사람이 염상구다. 염상구는 이 다리에서 깡패 왕초 땅벌과 치킨게임을 벌여 벌교를 장악한다.

철교의 교각은 모두 아홉 개였는데, 그들은 중앙 교각 위에 서 있었다. 기차가 "뙈액~" 기적을 울리며 검은 괴물처럼 철교로 진입했다. 그 순간 기차와 그들과의 거리는 교각 네 개의 간격으로 좁혀졌다.('태맥산맥' 1권 188쪽)



염상구의 형은 빨치산 대장인 '염상진'이다. 염상구는 벌교의 우익세력을 대표하는 청년단을 이끈다. 조정래는 한국전쟁의 또 다른 비극성을 형제간의 전쟁으로 표면화시키고 있다. 극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좌/우는 단순한 진영이 아니다. 죽고 사는 일이다. 삶의 태도로 보면 염상구는 악인이고 염상진은 선인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로 보면 염상구는 대한민국을 지키는 세력이고 염상진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세력이다.

당대를 살았던 민초들은 이쪽 편도 들어야 하고 저쪽 편도 들어야 하는 비극적인 아이러니의 상황에 놓였다. 오늘 '태백산맥'을 읽는 독자들 역시 아이러니에 처한다. 염상진을 응원하자니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이 되고, 염상구를 응원하자니 윤리적으로 용납이 되질 않는다. 이쪽 편도 저쪽 편도 들 수가 없다. 이러한 이중 삼중의 아이러니는 이러니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이자 역동성의 근간이기도 했다.



◆다시 벌교(筏橋)

철다리에서 아래쪽으로 700m 가량 내려와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 놓인 다리의 이름은 벌교대교다. 보성, 벌교, 순천을 잇는 2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놓였다. 이 다리는 주로 차만 다닌다. 그리고 2012년 남해고속도로 영암-순천 구간이 개통했다. 영등리와 호동리 사이 바다 위로 또 하나의 다리가 놓였다. 이 다리의 이름도 벌교대교다. 이 다리로는 오직 차만 다닌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가 아니면 다리의 이름을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다리가 아니라 그냥 도로의 일부일 뿐이다.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려야 만남을 연결하는 다리 구실을 온전히 할 수 있다.

벌교에서 시작된 벌교의 다리는 바다로 가까워지면서 점점 사람이 지워지고 바다 위에 놓이면서 아예 사람을 지우고 말았다. 벌교는'태백산맥'을 통해 문화의 시간과 장소를 재현하고 있다.

바다로 난 다리를 거슬러 올라가 홍교 바짝 위쪽으로 '벌교(筏橋)'가 하나 놓였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민물과 바닷물의 밀고 당김 속에서 제대로 흔들릴 수 있었기에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벌교(筏橋)'다. 역사의 질곡 속에서 좌/우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잘 흔들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 살아남아서 우리의 삶을 이고지고 올 수 있었다. 흔들릴 때는 제대로 흔들려야 버틸 수 있는 세월도 있다는 깨우침을 나는 21세기에 새로 놓인 벌교(筏橋)에서 마주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문학박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