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영화관 살리기 지역의 힘으로

'지역 영화관 살리기, 지역의 힘으로' <3> 여든셋 광주극장이 걸어온 길

입력 2017.07.19. 00:00 이윤주 기자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영화사 산증인

서슬퍼렀던 일제강점기

조선 자본인이 문 연

초대형 문화공간

해방축하공연·김구 연설 등

역사의 중요 시기마다

무대 내어줘

지난 12일 오전 10시 광주극장.

이제 막 손님맞이를 마친 극장의 문이 열렸다.

첫 상영시간은 오전 10시50분.

평일 오전, 오래된 단관극장에 누가 올까 싶었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친구들끼리 와 매표소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여성들,

2층에 걸린 사진을 둘러보는 한 쌍의 젊은 커플,

일찌감치 객석에 앉아있는 한 청년

그리고 널따란 극장 구석구석에 조용히 앉아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이들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다.

올해로 여든셋 국내 최고령이자 유일한 단관극장인

광주극장이 매일 아침 마주하는 일상이다.

#그림1왼쪽#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문 연 문화전당

광주극장은 출발부터 의미가 남달랐다.

서슬퍼렀던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자본으로 세워진 초대형 문화공간이었다.

양반이었지만 사업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최선진 유은학원 초대 이사장이 창업주로 당시 30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해 만든 곳이다.

최 이사장은 광주극장 개관 전 광주의 유일한 극장이자 일본인이 세웠던 제국관(옛 무등극장)에서 '아리랑'을 봐야한다는 현실에 비통함을 느끼고 극장을 세우게 된다.

1933년 법인을 설립한 후 광주읍이 광주부(府)로 승격한 1935년 10월1일 광주극장을 공식 개관한다.

1천25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4층 건물은 제국관(최대 700명)과 비교할 때 두 배에 가까운 규모로 당시 지역민들에게 건물 자체만으로도 큰 볼거리였다.

개관기념영화로는 최초의 발성영화였던 '춘향전'이 상영됐다.

광주극장은 개관 당시 영화만 상영하는 곳은 아니었다.

연극, 판소리, 노래공연, 연주회 등 다채로운 장르의 무대로 활용됐으며 간간이 권투경기도 열렸다. 특히 일본인들에게 밀려 충장로 4~5가로 밀려난 조선인들이 합법적으로 모여 의견을 나누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해방기념축하대공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남도위원회 결성식이 열렸으며 1946년 모스코바 3상 회의 지지대회,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의 연설 등 역사의 중요 시기마다 광주극장이 함께 했다.

또 일본의 권투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호리구찌를 이기고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문춘성 선수의 시범 경기가 열린 곳도 광주극장이었으며 최승희·이매방의 춤사위, 전국학생연극제 등도 모두 광주극장을 거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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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뜻 유지하려 옛 모습 복원

해방 이후 광주극장은 영화산업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1950년대 초반에는 주·야간으로 영화를 상영했으며, 1950년대 후반까지는 할리우드 영화가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1960년대에는 중흥기를 맞은 한국영화의 상영수가 급격히 늘었다.

그런데 광주극장은 1968년 1월 예상치 못했던 사고를 겪게 된다. 극장에 도둑이 들었고 대형화재가 발생, 극장 대부분이 소실된 것이다.

당시 내부적으로 극장 문을 닫자는 의견들이 많았지만 결국 극장으로 남았다.

광주극장을 처음으로 설립한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자는 결론을 내고 재건축에 들어간 것이다.

8개월여 걸친 공사를 마친 광주극장은 옛 모습으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건축된 건물의 표석까지 그대로 간직하며 원래 건물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광주극장은 건축사학적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꿋꿋하게 외길을 걷다

광주극장의 위기는 또 있었다.

1999년 서울 강변 CGV가 문을 열고 멀티플렉스의 시대가 시작됐지만 정작 광주극장은 법적다툼에 휘말리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했다.

1998년 6월 학교보건법 상 정화구역 내 유해업소로 지정돼 자진 이전 하거나 2000년 12월말까지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광주극장이 이에 불응하면서 2009년까지 검찰과의 지리한 공방이 이어진 것이다.

폐쇄의 위기속에 광주극장은 2002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예술영화전용관 사업에 공모를 했다 선정되는 기회를 안게 된다.

멀티플렉스의 공세 속에 변화의 기회는 놓쳤지만 광주극장만의 정체성을 쌓아가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된 셈이다.

1년 단위 사업이지만 2014년까지 단 한해도 빠지지 않고 예술영화전용관을 이어오며 광주극장은 멀티플렉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관객수도 초기에는 연 1만명 수준이었지만 다양성 영화에 대한 수요도 꾸준히 늘며 많게는 3만명까지 관객들이 찾았다. 광주극장이 품은 가치에 공감하며 극장 공간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행사들도 꾸준히 열렸다.

하지만 2015년 광주극장은 또 한번 선택의 늪에 빠지게 된다.

영진위가 예술영화전용관 지원사업에 대해 '사전검열'에 가까운 개악을 하자 광주극장은 끝내 사업신청을 거부했다. 당장 극장운영에 타격은 받겠지만 부당한 개입에는 응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힘겹지만 쉽게 타협하지 않고 외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광주극장이 소중한 이유다.

김형수 광주극장 이사는 "지원금을 빌미로 독립성과 자율성을 훼손시키는 정책들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며 "말없이 영화를 보러오는 관객들, 광주극장의 뜻에 응원을 보내는 후원회원들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이어 "광주극장 개관 100주년 때는 50년 이상 된 관객들이 가족들과 함께 와서 세상 걱정 덜 하면서 영화를 관람하기를 바란다"고 웃음 지었다. #그림3중앙#

이윤주기자 storyoard@hanmail.net 서충섭기자 zorba85@naver.com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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