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14>순창 설씨 부인 권선문

입력 2017.07.19. 00:00 최민석 기자
친척·이웃 급한 일 앞장 물론 권선문첩으로 사찰 중창
약비라는 중이 찾아왔다
부도암이 퇴락하여
새로운 절을 짓고자 합니다.
부인께 시주를 구하고자 왔습니다
설씨 부인은 사람들이 힘을 모으도록
두루 동참을 권하는 권선문을 지었다
설씨부인과 신말주가 살았던 순창 귀래정

설씨 부인(1429~1508)은 정 5품 무관직 사직(司直)을 지낸 설백민과 진주 형씨의 외동딸로 순창읍 가남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과, 자수, 서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어느 부모인들 그러지 않으랴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이 보기 드문 재원이라는 주위의 칭송에 설백민과 진주 형씨는 기뻤다.

설백민과 진주 형씨는 딸에게 선비의 학문과 덕성, 양반가 여성의 품격과 덕목, 세상에 대한 시야와 안목을 넓혀주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설씨 부인의 사회참여, 폭 넓은 교류, 유불선의 조예가 깊었던 배경이다.

설백민과 진주 형씨는 딸이 15세를 넘기자 혼처를 물색했다.

때마침 설백민의 형수인 고령 신씨가 찾아왔다. 고령 신씨는 남원 호촌 마을 신포시(1361~미상)의 딸이다. 신포시는 1383년 고려 우왕 9년에 식년문과에 급제, 조선 개국 후 좌사간 등 언관을 지냈다.

#그림1중앙#

고령 신씨는 설훈과 결혼하여 순창군 금과면 모정리에 살았다. 설훈은 훗날 창덕궁 직장(直長)을 지냈는데, 그의 아들 설계조(1418~1486)는 세조 때 옥천군에 봉해졌다.

설백민의 아내 진주 형씨는 고령 신씨를 반가이 맞아 상석으로 모셨다.

"자네 딸의 혼처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네. 마침 천생배필이 있네."

고령 신씨의 말에 진주 형씨는 귀가 솔깃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친정 조카 신말주를 자네 딸과 맺어 주세나."

고령 신씨의 아버지 신포시는 딸의 혼례 뒤 세 아들 신장, 신평, 신제를 데리고 남원 호촌에서 광주 서석산(무등산) 아래로 이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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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시의 장남 신장(1382~1433)은 나주 금안동 나주 정씨와 맹주, 중주, 숙주, 송주, 말주의 다섯 아들과 딸 둘을 낳았다.

고령 신씨가 설백민의 딸과 맺어주려는 신말주(1429~1503)는 외가인 나주 금안동에서 태어났다. 1433년 네 살 때 공조참판이던 아버지마저 여의고 셋째형 신숙주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일찍이 신동소릴 들었고 한글창제의 공신이며 성종 때의 영의정인 신숙주처럼 신말주도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그뿐인가? 체격이 다부지고 날렵했다. 아홉 자 되는 병풍을 둘러친 뒤, 그 안에서 몸을 솟구쳐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떤가? 딱 어울리는 한 쌍 아닌가?"

명문가의 자제로 앞날이 촉망되니 누가 봐도 좋은 혼처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혼사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설씨 처녀는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고 동갑내기 신말주와 혼례를 치렀다. 설씨 부인이 되었다.

신말주의 고모는 처숙모가 되고, 설씨 처녀의 숙모는 고모가 되었다. 그렇게 순창 설씨와 고령 신씨 두 집안이 겹사돈이 되었다.

기대한 대로 신말주는 25세이던 단종 2년(1454)에 생원시,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뭍사람의 칭송을 받았고, 설씨 부인의 기쁨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정변시기였다. 1455년 단종이 숙부 세조의 강압에 왕위를 내주었고 1457년 6월에는 강원도 영월로 유배, 10월에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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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신말주는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특히 갓 결혼하여 어린 자신을 부모처럼 길러주었지만 형이 세조 편에 선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신말주는 결단을 내렸다. 형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처가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설씨 부인과 향촌의 삶을 즐기던 신말주는 1468년 세조 사후 관직에 나갔으나, 1470년 다시 순창으로 내려왔다. 마을 뒷산에 귀래정을 짓고 독서로 소일했다. 설씨 부인도 귀래정에서 앵무, 비익조, 세락조, 공작, 연, 봉, 난 등의 화조도를 그리고 독서를 하며 마음이 화평하였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낸 신말주는 1476년 전주부윤을 시작으로 1483년 창원도호부사, 1487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대사간, 이듬해 첨지중추부사 겸 전라수군절도사를 지냈다.

그럴 즈음인 1482년 설씨 부인이 53세 때다. 그 해 봄 진달래, 개나리가 산천을 물들이던 어느 날이다. 설씨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 밤 꿈을 곰곰 되새겼다. 오랜만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꿈에 뵌 것이다.

어머니 형씨 부인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설씨 부인에게 일렀다.

'내일 어떤 사람이 찾아와 너와 함께 선한 일을 하자고 청할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되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이것이 너의 복을 짓는 큰 근원이 될 것이니라.'

그날 아침이다. 과연 지난 밤 꿈속의 어머니 말씀처럼 강천산 부도암의 약비라는 중이 찾아온 것이다.

'부도암이 퇴락하여 중조 스님께서 새로운 절을 짓고자 합니다. 역량이 부족하기에 감히 부인께 시주를 구하고자 왔습니다.'

#그림4중앙#

설씨 부인은 간밤 꿈의 신기함에 도와 줄 결심을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으도록 하기 위해 두루 동참을 권하는 권선문을 지었다. 또 세워질 절의 모습까지 그렸다.

'이 권선문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의 시주를 얻도록 하게나.'

약비로 하여금 여러 사람들을 찾아가도록 안내도 하였다.

이리하여 강천사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고, 1482년(성종 13)의 '강천사모연문'에 '이 해에 신말주의 부인 설씨의 시주를 받아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설씨 부인 16폭의 권선문첩은 가로 40cm, 세로 317cm 크기의 서화첩인데, 묵필로 쓴 14폭의 권선문과 2폭의 사찰채색도로 되어있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채색화이기도 한 이 권선문첩은 활발한 행서체로 쓰였는데 조선 초기 사대부 여인의 사찰에 대한 관심과 당시의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다.

설씨 부인은 어려운 친척의 혼사를 앞장서 돕고 이웃의 급한 일을 몸소 챙겨주었다 한다.

설씨 부인이 아팠을 때 성종이 어의를 순창까지 보냈다는 일화도 있는데, 1503년 부인은 74세의 신말주를 먼저 보내고, 1508년 자신도 동갑 남편을 만나러 갔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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