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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진의 새로 쓰는 남도의 문학과 문화5.우애(友愛)란 이런 것이다! 정약용의 '율정별(栗亭別)'에 부쳐
입력시간 : 2017. 06.19. 00:00


새벽 등잔불 꺼지듯 이별 앞둔 형제 아쉬움만 커지고



신유년만 벌써 두 번째 유배다

1801년 정약전, 약용 형제는

나주 율정서 하룻밤을 묵었다

정약용의 율정별은

이렇게 목메는 눈물로 시작한다

뜬눈으로 지새웠을 밤의 끝자락에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이별을 앞둔 아쉬움과 애틋함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눈물만 흐르네”



1818년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 이태 전에 약전은 죽는다

율정 주막의 밤이

마지막 만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을 끝내 살린 것은

‘글쓰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방대한 저술은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약전은 '자산어보'를 썼다

바닷고기에 대한 상식없이

어부들에게 핀잔을 들어가면서

‘어보’를 기록한 연유는 무엇일까

"흑산도 고래는 ‘이빨이 산만큼’

크지 않다네 형 걱정은 마시고

아우님 건강, 안녕 잘 돌보시게”



작은 서울 나주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인생 꿈 하나는 서울구경이었다. 아쉬운 대로 그 꿈을 실현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물론 서울을 실제로 가 본 사람은 극소수다. 남도 사람들은 서울 대신 나주를 구경했다. 나주성은 한양성의 축소판으로 구성되었다. 특히나 영산강은 한강의 위치에서 흐르고 있어서 땅 모양 또한 서울과 흡사했다.


나주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야기를 간직한 흔적들이 구도심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문화 시대에 들어 이 흔적들은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나주시에서는 이야기를 징검다리 삼아 걸으며 나주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이야기 고샅길’을 마련해 시민들을 맞고 있다.

두 개의 길이 마련되어 있다. 하나는 금성관을 출발해 걸어서 한 바퀴를 돌아오는 서부길이다. 다른 하나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기 좋은 동부길이다. 동부길은 금성관에서 출발해 목사내아를 거쳐 천주교 나주성당을 지난다. 그리고 나주성의 북쪽 ‘북방문’에 이르게 된다. 동부길은 오른편으로 돌아 영산강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동부길에서 벗어나 복원 중인 북망문에서 2㎞ 남짓 북쪽으로 오르면 동신대 삼거리가 나온다. 이것은 최근에 새로 난 길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삼거리는 이보다 700m 정도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세 길이 통하는 곳이라 해 ‘삼도(三道)’로 칭했던 곳이다.

장성에서 나주로 드는 길이 1도고, 나주에서 목포로 가는 길이 2도고, 나주에서 해남으로 가는 길이 3도였던 셈이다. 이곳에는 생전 마지막이 될 밤을 보내고 애틋하고 애절하게 이별 나눈 형제 이야기가 아직도 살아 있다.



샛별 같은 이별



띠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 푸르스름 꺼지려하고

일어나 샛별을 보니 이제 곧 헤어질 일 참담하네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두 사람 서로 할 말을 잃고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눈물만 흐르네

- '율정별' 처음 부분



신유년에만 벌써 두 번째 유배다. 1801년 두 번째 유배에 오른 정약전(1758-1826), 약용(1762-1836) 형제는 한양에서 길을 나서 나주 율정에 이른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정약용의 율정별은 이렇게 목메는 눈물로 시작하고 있다.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을 밤의 끝자락에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이별을 앞둔 아쉬움과 애틋함이 잘 드러나 있다.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눈물만 흐르네” 이 대목에서 우리 또한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흑산도로 유배가는 형님 걱정



흑산도는 멀고 먼 바닷가 하늘 끝에 맞닿은 섬

어찌하여 형님은 그런 곳으로 가시어야 하는가

고래란 놈들 이빨이 산만큼 커 배도 삼켰다 뱉어냈다

지네란 놈은 쥐엄나무 등걸만큼 크다고 하고

독사들이 등나무 등걸처럼 뒤얽혀 있다는데

- '율정별' 중간 앞부분



한양에서 내려오는 길에 서로의 유배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을 유배지로 데려가는 관리들도 흑산도에는 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전해들은 흉흉한 이야기를 짐작으로 하다 보니 약용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심정이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첫 번째 유배



내가 장기읍에 있을 때를 떠올려 보니

밤낮으로 강진쪽만 바라보았네

새처럼 날아 푸른 바다를 가로질러 가서

그 바다 가운데 섬에서 우리 형님을 보았어라

- '율정별' 중간 뒷부분



조선에서는 천주교가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왕권을 부정하는 것이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지배세력이나 대중 모두 천주교를 경원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빨갱이’의 멍에처럼 ‘천주교도’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최고의 위력을 발휘했다.

정약용이 천주교도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1801년 3월 소위 신유사옥으로 정약용은 포항 장기에 유배된다. 형 약전과 양종이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약종은 죽고 약전은 완도 신지도에 유배된다. 3연은 그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형님이 계신 완도 신지도 쪽을 바라보면서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잘 그려져 있다.



두 번째 유배



이제 나는 교목 위에 올라서 영전된 기분인데

진주는 어디가고 껍데기만 남은 셈이네

나는 어리석은 바보아이처럼 헛되이 무지개를 붙들려 했네

서쪽 언덕 활처럼 굽은 땅에 분명 아침 무지개를 보았는데

아이란 놈 무지개를 쫓아갈수록 무지개는 더욱 멀어져

가고 보면 또 다른 서쪽 언덕 서쪽 또 서쪽에 있네

- '율정별' 끝부분



유배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진다. 1801년 신유사옥으로 인한 천주교의 박해 현황과 대책을 적은 백서가 북경의 주교에게 전달되기 전에 발각된 것이다. 황사영은 배다른 맏형 정약현의 큰사위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둘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죽음을 예상했지만 천신만고 끝에 둘은 다시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이서 나주까지 동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약전이 완도 신지도에 있었다면 강진은 지척이다. 첫 유배의 거리에 비하면 마치 나무의 꼭대기와 뿌리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약용이 강진으로 오게 되니 약전은 서쪽의 끝 흑산도로 가게 되었다. 진주는 가고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어리석게도 형을 좇는 마음이 지나쳐서, 절해의 고도 흑산도로 가게 한 것은 아닌가. ‘또 다른 서쪽 언덕 서쪽 또 서쪽에 있네.’ 이 시의 마지막에는 자책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걸 본 형은 또 얼마나 마음이 쓰였을 것인가.



자산어보와 목민심서

1818년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풀려난다. 그 이태 전에 약전은 죽는다. 율정 주막의 밤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을 끝내 살린 것은 ‘글쓰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방대한 저술 작업은 그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써 가고 있을 때, 약전은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썼다. 바닷고기에 대한 상식이 없는 약전이 어부들에게 핀잔을 들어가면서까지 ‘어보’를 기록한 연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율정별의 중간 앞부분도 작은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우님 보시게! 흑산도 고래는 ‘이빨이 산만큼’ 크지 않다네. ‘배도 삼켰다 뱉어냈다하지 않는다네’. 형 걱정은 마시고, 아우님 건강, 안녕 잘 돌보시게.” '자산어보'는 자신을 무지개처럼 좇은 안타까운 심정의 아우에게 보내는 긴 편지는 아니었을까!

이 편지는 제때에 온전히 전달되지는 못했다. 벽지가 되어 있는 '자산어보'를 유배에서 풀려난 약용이 옮겨 적었다고 한다. 한 자 한 자 옮겨가면서 약용은 그 율정의 밤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주시 성북동 연화제 근처에는 조선 최대의 형제간 우애를 기릴 수 있는 이정표 하나쯤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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