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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육상실크로드(2) 중앙아시아의 중심지 ‘타시켄트’
입력시간 : 2017. 05.19. 00:00


농사 잘짓고 성실한 종족에 소련 정부 적극 지원



1917년 적색 혁명군은

절대적 약세에 있었다

고려인들은 결사 특공부대를 결성

아무르 강에 뛰어 들어

인간 다리를 만들었다

추위와 강물을 거스르며

생명을 버리는 모습에 백색혁명군은

전의를 상실해 항복했다

결국 공산혁명은 성공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소련이 물자부족으로 어려울 때

농업으로 자리 잡은 고려인들이

정부에 전쟁 보급물품을 헌납한다

또 독일과의 전쟁 최일선에서

계급도 없이 육탄으로 뛰어 들어

살신하는 용감성을 발휘하자

고려인에 대한 인식 전환을 하게 된다



▶초기 정착 자는 전라도 인(人)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고려인들의 뿌리는 일제 강점기에 연해주로 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850년경 주로 전라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현재 이들이 쓰는 언어와 생활 풍습에서 전라남도의 해안가 언어와 풍습이 많이 발견된다.

조선의 왕권이 안동 김씨 외척에 휘둘려 약화되자, 삼정이 문란하게 되고 관료들의 부패가 심해졌다. 국가의 통제는 지방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특히, 전라남도 지방과 해안가는 더더욱 관리들의 부패가 심했다. 대부분 소작인이나 천민계통으로 삶이 고단했다. 이들에게는 살고 있는 고향이 정감있고 그리운 대상이 아니라, 핍박받고 압박받는 곳이었다.

이들은 야반도주로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났고, 그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함경도 지방 이었다. 그러던 중 갑오경장을 맞아 만주의 고려인들을 함경도 또는 평안도 지방으로 이주시키는 보민정책을 펼치자 이곳에는 많은 이주민이 생겨났다. 조정의 통제도 강화되었다. 호패를 갖지 못한 일부 유민들은 통제를 피해, 청국의 접경지역인 연해주로 옮겨갔다. 조정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연해주’는 그래도 살만한 곳이었다. 그래서 1800년대 말에서 1900년 초에 많은 사람들이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했다. 또한 간도와 연해주로 간 조선인들의 일부는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옮겨 갔다.



▶고려인의 자발적 이주 권장

당시 러시아는 “식량문제 해결”을 하기 위하여 황무지 개간의 필요성과 동시에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족의 민족주의 발판을 흔들어 놓기 위한 일환”으로 고려인들의 자발적인 이주를 권장했다. 고려인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온 관계로 농사를 잘 짓는 농업기술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부지런한 종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1924년도에 우즈베키스탄의 타시켄트에는 한국인들 모임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였다. 모임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소련정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1934년, 35년, 36년, 심지어 37년도에도 자발적인 이주자가 있었으며, 이들은 국가 보상을 받고, 토지와 집을 지을 건설자재, 그리고 이주 보상금을 받으며, 중앙아시아를 개척했다. 이들은 농업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소련 정부도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했다.



▶공산주의 혁명 성공에 기여

1917년 소련 ‘공산주의 혁명’이 발발했을 때, 혁명군은 절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 때 아무르 강의 양 연안에 ‘백색 황제군’과 ‘적색 혁명군’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적색 혁명군은 무기와 인원 등에서 절대적으로 약세에 있었다. 그래서 황제군은 태평하게 혁명군을 소멸하려고 도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고려인들이 결사 특공부대를 결성하고 자원하여 서로 손을 묶은 다음 아무르 강에 뛰어 들어 아무르 강에 인간 다리를 만들었다.

얼음이 둥둥 떠내려가는 살을 에이는 추위와 강물을 거스르며 생명을 버리는 모습을 보고 백군은 전의를 상실해 항복했고 그 소식이 장군이나 함장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이는 이미 러시아 황제의 운이 다했다고 판단케해, 혁명군을 가담시켜 공산혁명을 성공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러시아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아무르 지역에 전설과도 같이 촌노에게 전해지며, 특히 오로라호의 함장 가족이 그 이야기와 함께 함장이 차고 있던 소형 단도를 2003년 고려인에게 전해 주면서 증언해 알게 되었다.



▶사할린 동포의 강제 이주

또 2차 세계대전 때는 ‘강제이주’로 많은 조선인들이 들어왔다. 당시 일본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고려인들이 만약 2차 대전이 끝난 후 기득권을 주장 하거나, 1912년 러시아 해군지도에 표기된 대로 하바로프스크까지가 조선의 영토였으므로, 하바로프스크까지 조선의 영토로 인정할 것을 주장하면,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한 부동항과 태평양권을 상실할 것을 우려하여, 고려인들에게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누명을 씌워 강제 이주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강제 이주는 짐승보다도 못한 대우 속에 열차를 이용하여 1937년에 행해졌다. 경찰이 아니라 공산당 보위부 소속의 군인들이 집행했다. 조선인 강제이주는 최소한의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만행이었다. 이주 과정에서, 글자를 알거나 조선 독립과 연계되었거나 하는 고려인, 즉 식자층이나 지도층은 미리 모두 총살을 시켜 증거 인멸을 주도하였다. 이래저래 죽은 자가 절반을 넘었다. 강제 이주자에게는 공민증마저도 주지 않아 거주이전의 자유조차도 없었다.



▶고려인에 대한 인식 전환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소련은 물자부족으로 어려움을 받고 있을 때, 짧은 기간에 농업으로 자리를 잡아간 고려인들이 소련 정부에 전쟁 보급물품을 대량으로 헌납함과 아울러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 시에 최전선에 계급도 없이 육탄으로 뛰어 들어 살신하는 용감성을 발휘하자 소련 정부도 고려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또한 조선 독립운동을 펼치던 인사들을 모두 제거해 통제가 가능해 지고, 탄압보다는 고려인을 인정하고 이용하자는 시각으로 정책이 전환되었다. 더불어 스스로의 반인류적인 행위를 덮고자, 이주에 관련 되었던 공산당 보위부 소속 전원을 2차 대전이 끝나기 전에 직권 남용 등의 죄목으로 모두 처형시켰다. 보위부 소속 군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고려인들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전쟁 후 냉전체제로 편입이 되면서 미국을 견제하고 일본과 태평양에서의 우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반도를 중요 교두보로 격상시켜 이 한반도에서 소령의 우월권을 확립시키고자 2차 대전에 지원했던 고려인들을 소련군으로 편입시키고 이들을 훈련시켜서 소련군의 장교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소련의 공민권과 함께, 북한의 공민권을 주어, 북조선에 파견하여 북조선을 장악하게 하였다. 그래서 외부세계엔 북조선이 자주 독립적인 국가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북한에서 활동하였던 고려인들은 월급을 비롯한 모든 생활기반을 소련 본국에서 수령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소련으로 돌아와 소련 정부가 지급한 집과 직장에서 일하고 일부 현재까지 생존한 사람들도 러시아 또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구 소련권의 국가들에서 국가연금을 수령하고 있다. 차후 김일성이 러시아의 과도한 간섭에 반항하여 그들(고려인 러시아 군인)들을 숙청할 때까지 고려인들은 북조선의 공민증과 소련의 공민증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교육열과 근면으로 위상 제고

소련의 조선인들의 처우가 결정적으로 전환이 된 것은 ‘후르시초프’의 중앙아시아 방문이 계기가 되었다. 1955년경 어느 날 후르시초프가 농업생산성이 높아 부유하고 모범이 되고 있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뽈리타젤’의 조선인 거주지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러시아 일반 농가에서 재배하는 옥수수 키보다 3-4배가 되고 수확량도 많은 거대한 옥수수를 보고, 비로소 조선인의 근면 성실함과 농업에 있어서의 탁월한 역량을 인정한다. 그리고 옥수수씨를 받아 전 소련에 재배하면 당시 흉작으로 절박했던 구소련의 식량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전 소련에 이 옥수수를 심을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농업경영실적은 고려인의 20-30%에도 못 미치는 저열한 것이었다. 결국 식량증산에서 실패를 보았고, 옥수수라는 별명을 들으며 정권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맞는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잔여 모든 조선인들에게 공민권을 주게 되고, 이로서 조선인들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래서 소련을 구성하는 160여개의 민족 중 러시아인을 제외하고는 조선인들의 학력이 제일 높았으며, 또 ‘국가 최고 노력 영웅훈장’도 제일 많은 분표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소련이 분해되면서 조선인들은 다시 한 번 생존권의 위협을 받게 된다. 다행히 구소련권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대한민국의 위상과 경제적 원조 등으로 고려인들에 대한 처우가 향상되었다.



▶소련 붕괴 후 각국의 독립과 어려움

그러나 구소련 시기에 많은 고려인들의 근시안적이고 편견적인 민족관(예컨대 러시아인은 일등 민족이고 고려인은 이등민족이고 현지 원주민은 미개하다고 생각하고 현지 원주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언어를 습득하지 않았기에)을 갖고 있다가, 각국이 독립하여 민족주의가 높아진 상황에서 기존의 러시아 언어를 배격하고, 자국 민족의 고유한 언어를 공식화하고 문서화하자 언어를 몰라 자연히 그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욱이 독립하여 어수선하고 국가상황이 어려운 가운데서 대한민국과 러시아가 함께 주장한 연해주 지역의 고려인 자치주 건립 문제로 많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이탈하여 러시아로 떠나가자 원주민들이 기존의 고려인들이 근면하고 성실한 민족이라는 생각에서 고려인은 신뢰할 수 없는 민족으로 인식되어 남아 있는 고려인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을 근면 성실하고 똑똑한 민족으로 존중하고 있고 또 문화가 서로 비슷하여 동질성을 많이 느끼며, 형제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다.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고려인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많은 부문에서 러시아화(化) 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인으로서의 전통도 유지하며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고려인들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 한 4가지는 바로 출생과 관련한 ‘돌’, ‘결혼’, ‘환갑’, 그리고 ‘장례’와 삼년상이다. 이 4가지가 고려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근원적인 행사이다. 또한 ‘한식’은 고려인 가족 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는 조상에 대한 추모와 가족에 대한 우애와 격려의 장이었다. 장례문화는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고, 전반적으로 고려인들의 종교는 불교라고 인식되어져 왔다.

그러나 1991년 이후 기독교 선교사가 집중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고려인들의 전통적인 생활습관인 관혼상제를 바꾸어 놓고 있어 정체성의 혼란을 빚고 있다. 또한, 초기 대한민국 대사관이 설립될 때부터 관료주의의 병폐적인 시각으로 고려인에게 대한 이해의 부족과 우즈베키스탄의 법률적인 정보의 미비로 고려인의 분열을 조장한 면도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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