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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의 지리산둘레길을 가다(24) 길을 마치며
각기 다른 길이 하나로 이어지던 날
길은 내안의 강이 되어 바다로 간다
숲길을 걷다 죽으면
나무가 되거나 바위가 될 것 같았다.
어쩌면, 한 일 년 쯤 더 걸으면
죽지 않고 살아서도
나무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숲의 시간은 소리 없이 흐르면서도
꽃 한 송이
제때에 피어내는 것을 잊지 않았고
권력의 시간은 요란했으나
꽃 한 송이 피어내지 못했다.
때가 되어도 피지 않은 꽃을 위해
사람들이 스스로 꽃이 되는 날에도
숲에서는 변함없이
꽃들이 피었다가는 지고, 열매를 맺었다.
- 삶의 무게 같던 수많은 치와 재의 고개들과 그 고갯길을 함께 넘어주던 바람은 어디쯤 지나고 있으며, 대축마을 민박집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홀로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시간은 또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 텐가.
- 구간이 늘어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발은 숲길에 익숙해졌으나 그럴수록 글은 낯설지 못해 애달았다.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어지러이 휘날렸고, 휘날리는 단어들을 문장으로 잡지 못한 날에는 책상 앞의 손이 산길의 발보다 더디었다.
입력시간 : 2017. 03.24. 00:00


고개를 넘고 마을을 지나고 당산나무 아래 쉬어가던 지리산둘레길의 시간은 이제 내 안의 맑고 깊은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른다. 대축마을에 닿기 전의 고갯길 아래로 운무 속 섬진강이 길처럼 흐른다.
내게서 길을 보고, 길에서 나를 보는 숲길은 적막했고, 적막의 끝에서 비리고 떫은 성정이 가을날의 홍시처럼 순치되길 바랐다. 인월-금계구간의 등구재 넘어가는 숲길.


연극인들은 무대에서 공연하다 죽는 것을 꿈꾼다고 한다. 지리산둘레길을 가면서 연극인의 희망처럼 “숲길을 걷다 죽는 일도 꽤나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길을 걷다 죽으면 나무가 되거나 바위가 될 것 같았다. 어쩌면, 한 일 년 쯤 더 걸으면 죽지 않고 살아서도 나무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무가 될 바에야 사철 푸른 소나무보다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하는 계절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그런 나무가 되고 싶었다. 구례의 당동마을이나 남원의 용궁마을에 닿기 전, 숲길에서 보았던 키 큰 개오동나무가 되어 여름날엔 날짐승 불러 모아 그늘아래 노래하게 하고, 겨울날엔 밤새 내리는 눈발을 맞으며 허허로움에 몸부림쳐도 되리라 했다.

꿈이 나무로 깊어갈 때 쯤, 지리산둘레길은 예정된 종점에서 종점을 의심하며 끝났다. 의심은 산길을 벗어나고 다시 온 토요일 아침, 배낭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를 느끼면서 상실의 실체가 되었다.
늙은 서어나무나 개오동나무만큼은 아닐지라도 작은 새 한 마리 깃들 수 있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주천-운봉구간에서 만나는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




별개이고 하나인 길

지난해 4월 첫날, 남원의 주천에서 시작한 길이 해를 지나 지난 3월 11일 구례의 당재에서 마무리되었으니 꼬박 1년이 걸렸다. 길을 마무리 하던 날 당재의 한낮 숲은 조용히 흐르고 숲은 전날의 대통령 탄핵으로 종일토록 빠르게 흘렀다.

지리산둘레길을 지나는 1년의 시간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숲의 시간은 소리 없이 흐르면서도 꽃 한 송이 제때에 피어내는 것을 잊지 않았고 권력의 시간은 요란했으나 꽃 한 송이 피어내지 못했다. 때가 되어도 피지 않은 꽃을 위해 사람들이 스스로 꽃이 되는 날에도 숲에서는 변함없이 꽃들이 피었다가는 지고, 열매를 맺었다.

지리산둘레길 스물두 개의 구간은 각각의 사연을 안고 흐르는 하나의 길이었다. 지리산 고리봉에 떨어진 빗방울 하나가 남원의 람천이 되고 람천은 함양에서 엄천강을 이루어 흐르다 산청에서 다시 경호강이 되어 낙동강으로 가듯, 그리움은 남원 장항마을의 400살 먹은 노루목 당산 소나무에서 하동 대축마을의 600살 된 문암송으로 흐르고 선비의 자존심은 산청의 남명 조식선생에게서 구례의 매천 황현선생으로 이어졌다.



바람은 고갯길을 함께 넘어주고
지리산 기슭의 오래된 땅에서 사람들은 순박했지만 역사는 잔혹했다. 왜구가 흘린 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인월 람천의 피바위에 진달래꽃이 붉게 피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벽해율전(碧海栗田)으로 바뀐 오래된 땅에서 사람들은 밤꽃처럼 순박했지만 역사는 잔혹했다. 람천의 바위는 왜구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고 달뜨기 능선으로 숨어들던 빨치산들은 지리산의 흙이 되었다. 관군에 쫓겨 온 동학의 이름 없는 목숨은 산청의 중태마을 골짜기에서 부릅뜬 눈으로 죽고 이념이 삶을 지배하던 시대에 산동의 열아홉 살 소녀 백부전은 오빠를 대신해서 처형장으로 갔다.

그러고 보니 인월 중군마을의 날달걀을 먹으라고 건네주던 할머니도, 버려진 자전거 바퀴살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놓고 등물이라도 하고 가라던 서당마을 뒷골의 할아버지도, 정돌이 민박집의 진돗개도, 섬진강의 수달도 다들 안녕한지 모르겠다.

구룡치 등구재 목아재 구리재 밤재 등 넘어야 할 삶의 무게 같던 수많은 치와 재의 고개들과 그 고갯길을 함께 넘어주던 바람은 어디쯤 지나고 있으며, 대축마을 민박집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홀로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시간은 또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 텐가.



내안에 흐르는 강
마적도사와 아홉 마리 용의 전설을 안고 있는 엄천강이 용유교 아래로 흘러 경호강으로 간다.


길은 계절에 상관없이 적막했고, 적막해서 깊었다. 적막하고 깊은 길에서 목숨들은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고 길은 내버려둠으로써 주관했다. 숲길에서 만나는 시간은 엄정하여 경외로웠고 길손도 한 마리의 숨탄것에 불과했다.

그 길에서 나는 퍼즐조각을 맞추듯 생각의 편린들을 이어가며 숲길의 적막에 닿고자 했다. 적막에 닿은 내 영혼이 맑은 날 빨래 마르듯 말라 자유롭게 날리길 바랐다. 더러 유치하여 비리고 까칠하여 떫은 성정이 가을햇살에 빛나는 홍시처럼 순치되고, 늙은 서어나무나 개오동나무 만큼은 아닐지라도 내 안에 작은 새 한 마리 깃들 수 있기를 희망했다. 숲에서 나를 보고, 내게서 숲은 보는 길이었다.

하지만 편린들을 모아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둘레길의 고개를 넘는 일보다 힘들었다. 구간이 늘어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발은 숲길에 익숙해졌으나 그럴수록 글은 낯설지 못해 애달았다.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어지러이 휘날렸고, 휘날리는 단어들을 문장으로 잡지 못한 날에는 책상 앞의 손이 산길의 발보다 더디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문장으로 잡히지 않은 단어들이 슬라이드 사진처럼 계곡의 물소리로, 칡꽃의 향기로, 긴장했던 멧돼지의 흔적으로, 용서가 서러운 방곡마을의 한으로, 하동 시외버스 터미널의 비릿한 재첩국물로 날린다.

이제 지리산둘레길의 시간은 내 안에서 맑고 깊은 강줄기 하나 이뤄 바다로 가고 있다. 강은 흐르고 흘러 전설이 될 것이다. 그 시간들의 축복에 감사한다. 나마스테! (끝) /시민전문기자 kanjoys@hanmail.net

지리산둘레길 24개 구간과 둘레길 안내센터의 위치와 연락처


길 안내(종합)



‘헤매는 발길’이 아름답다

□ 길 찾기

‘조영석의 지리산둘레길을 가다’의 연재는 둘레길의 1구간이 시작되는 남원의 주천에서 붉은색 화살표를 따라 시작했다.

지리산둘레길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나무로 만들어진 장승형의 둘레길 이정목에는 붉은색과 검정색의 두 가지 화살표가 새겨져 있다. 이정목에는 구간별 거리표시와 함께 위치번호가 표시돼 있어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순례를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같은 색의 화살표를 줄곧 따라가면 목적지에 닿는다.

붉은색은 남원- 함양- 산청- 하동- 구례- 남원으로 이어진다. 검정색은 역방향이다. 둘레길 중간에 녹색 화살표가 있다. 녹색 화살표는 서당-하동읍과 목아재- 당재의 지선 2개 구간에만 있다. 둘레길 표시는 갈림길의 도로에도 그려져 있다.

그래도 길을 잃을 수 있다. 다음 이정목이 30여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을 때는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잠시 행운의 길을 맛보고 있다고 여기면 된다. 둘레길에서는 길 잃을 권리가 있고 길 잃음은 특별한 이에게만 덤으로 주어지는 행운이다. 가요에서는 ‘헤매인 여자’가 아름답고 둘레길에서는 ‘헤매는 발길’이 아름답다.



□ 교통 및 숙박 정보

둘레길이 속한 5개 시군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기본이나 구간에 따라 마을버스의 배차 간격이 두 세 시간을 넘는 경우도 있다. 사전에 이들 시외버스터미널로 배차 시간을 문의 하거나 해당 구간이 속한 둘레길 안내센터, 해당 시군의 문화관광과 등에 문의한 뒤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배차 시간은 하절기와 동절기가 다르다. 필요할 경우 구간마다 팻말로 부착돼 있는 연락처를 통해 콜택시나 개인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둘레길에는 민박이나 펜션 등이 들어서 있지만 구간에 따라 숙박시설이 없는 곳도 있고 성수기에는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민박을 권한다. 어둠이 내린 산골 민박집에서 별을 헤며 하룻밤을 나는 것도 지리산둘레길이 주는 깊은 맛의 하나이다. 비성수기에는 고갯길에 나뭇잎처럼 걸려 있는 민박집 전화번호로도 충분히 예약 가능하다. 민박마다 샤워시설이 갖춰져 있고 지역의 특산물이 반찬으로 오르는 아침 밥상은 정성스럽다. 물론 막걸리를 곁들인 저녁식사도 가능하다.

둘레길 안내센터를 이용할 경우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교통수단뿐만 아니라 숙박시설 등을 포함한 둘레길의 여러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현장에서는 쉬어갈 수도 있다. 다만 월요일은 휴무다. 치밀한 사전 계획이 필요한 여행자는 인터넷 지리산둘레길(jirisantrail.kr)도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은 완벽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불편을 감내하는 것이다. 여행의 본질은 낯설음이고 낯설음은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추억이 별이 될 수 있다면 별은 불편함으로 빛나는 행성이다. 일단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만 가라.



□ 준비물 및 수칙

어느 구간을 가든지 식수와 간식이 필요하다. 특히 여름철엔 여분의 식수와 염분을 보충하기 위한 죽염 등을 지참해야 한다. 구간에 따라 민박이나 펜션, 간이 휴게소 등이 있으나 이들 시설은 대체로 구간의 처음과 끝에 있기 마련이다. 공중급유 하듯이 중간 중간 자가보충할 수 있는 간식이나 식수는 필수다. 여벌의 옷이나 햇볕을 가릴 수 있는 모자 등은 기본이다.

지리산둘레길을 가다보면 밤이나 감나무, 매실 등의 과수원과 고사리밭 등을 자주 지나게 된다. ‘애써 가꾼 농작물이니 손대지 말라’는 표식이 아니더라도 길손이 지켜야 할 첫 번째 수칙은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산길을 가다 보면 멧돼지 등 야생동물의 흔적을 종종 보게 된다. 배낭에 방울이나 종을 매달아 나의 존재를 알리는 것도 멧돼지나 뱀 등 대면이 불편한 생명들과 조우를 회피하는 한 방안이다.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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