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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의 지리산둘레길을 가다(20) 난동- 산동
산동의 온천수에 피로를 씻고,
산수유 막걸리에 세상을 담고

누군가가 제 마음대로 무작정
내 마음속에 들어오듯이
지리산이 그랬다.
굳이 따지자면 길을 그리워했지
산을 그리워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워 한 적이 없는 산이
나를 대책없이 설레게 했다.

“젊어서 많이 먹고, 많이 놀러 다녀!
나도 마음만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할머니의 말씀에서
젖은 바람소리가 났다.


숲길의 오리나무는
묵은 열매를 매단 채 새싹이 돋고
진달래도 좁쌀 만한 꽃망울을 틔우고 있다.
겨울의 한 복판에서
봄날을 꿈꾸는 숲은 은밀하기만 하다.


뒷짐 진 채 걸어도 돌부리에 채이지 않을 만큼 임도는 넓고, 넓은 산길은 무심하다. 구리재를 오를 때는 햇볕을 가릴 모자와 무심을 채울 화두 하나쯤은 챙겨야 할 성 싶다.

탑동마을로 가는 길에 수확의 손길을 비껴간 산수유 열매가 보석으로 매달려 길손의 아쉬움을 달랜다.


입력시간 : 2017. 01.13. 00:00


구렁이가 지나가듯 산길은 꿈틀대며 휘어지고 겨울의 한 복판에서 봄날을 꿈꾸는 숲은 은밀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정분이 났나 싶다. 그리다 만 지평선 같은 노고단 정상과 뻗어 내린 산맥들이 울컥 반갑다. 반가운 것은 그리웠다는 것이리라. 누군가가 제 마음대로 무작정 내 마음속에 들어오듯이 지리산이 그랬다. 굳이 따지자면 길을 그리워했지 산을 그리워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워 한 적이 없는 산이 나를 대책 없이 설레게 했다.

긴 기다림 끝에 꽃망울이 터지듯 둘레길의 발길을 떼기 시작한 지난 해 3월부터 정분의 꽃망울이 조금씩 영글고 있었나 보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버스는 승객 셋을 태우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출발했다. 차창의 화면을 노고단 줄기가 가득 채웠다. 바람 찬 구례 들녘과 산 아래 마을들은 어디로 가고 보이지 않았을까.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듯 노고단에 눈이 멀었음이라.

길의 종점에 다다라서야 ‘산을 사랑한다’는 말의 한 귀퉁이를 겨우 깨달았다. 눈도 쌓이지 않는 메마른 겨울 산이 꽃 병을 앓은 봄 산 못지않다.

구례버스터미널을 출발한 남원행 버스는 시골마을의 정류장을 일수 찍 듯이 지나다 20여분쯤 걸려 난동마을에 닿았다. 할머니 한 분이 함께 내렸다. 옆 마을 온동리에서 열아홉에 시집왔다는 최정순 할머니(81)는 병원에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길손의 나이를 묻더니 “일흔 다섯까지는 한창 좋을 때”라고 했다. ‘좋은 시절’이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 얼른 마음속의 주판알을 튕겼다. 사실 새해 첫날에 셈하는 ‘더하기 1’의 나이는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칼만큼이나 스산했고 부담스러웠다.
지초봉 구리재 정상의 쉼터. 오르막이 끝나고 견두산 줄기를 보며 탑동마을을 거쳐 산동면사무소까지 가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난동마을의 소담한 돌담

“젊어서 많이 먹고, 많이 놀러 다녀! 나도 마음만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할머니의 말씀에서 젖은 바람소리가 났다. “집에 들어가서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뒤로하고 길을 가는데 ‘일흔 다섯’이 자꾸 따라 온다. 그 녀석의 눈에도 한창 때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철없음으로 인해 길손은 아직 한창 때가 맞나 보다.

난동정류장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서면 집과 집, 논과 밭의 허름한 경계를 이루는 돌담 울타리가 지리산 기슭의 산골마을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무너지거나 넝쿨진 돌담은 최근 들어선 듯한 별장식 건물의 벽돌 담벽으로 인해 더욱 소담스럽고 마을 어귀의 늙은 적송 몇 그루는 적당히 구부러져 사람의 나이 듦을 위로 한다.

마을 안길을 거슬러 올라 길은 난동갈림길에서 숲으로 들어서며 시작된다. 지초봉으로 들어서는 초입이다.

계절은 더디 오거나 또는 겨울을 건너 뛰어 가버린 듯 했다. 소한을 막 지나 대한으로 가는 절기의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포근했다. 숲길의 오리나무는 묵은 열매를 매단 채 새싹이 돋고 진달래도 좁쌀 만한 꽃망울을 틔우고 있다. 겨울의 한 복판에서 봄날을 꿈꾸는 숲은 은밀하기만 하다.

길은 갈지(之)자로 이어진 포장된 임도를 타고 지초봉의 구리재를 넘어 산동으로 간다. 지초봉은 진도 홍주를 빚는 원료로 잘 알려진 지초(芝草)가 많아서 얻은 이름이다. 하지만 마른 숲에 지초는 보이지 않고 춘란만 시퍼렇게 살았다. 난동마을의 이름이 난초의 난(蘭)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를 겨울 숲이 증명해 보이고 있는 셈이다.

난동갈림길로 이어지는 난동마을 안길의 풍경


구렁이 꿈틀대는 구리재 가는 길

뒷짐 진 채 걸어도 돌부리에 채이지 않을 만큼 임도는 넓고, 넓은 산길은 무심하다. 마음을 짓누르는 버력더미를 하나씩 내려놓고 걷기에 제격이다. 구리재를 오를 때는 햇볕을 가릴 모자와 무심을 채울 화두 하나쯤은 챙겨야 할 성 싶다.

길은 난동갈림길에서 한 시간쯤 걸려 구리재에 닿는다. 재의 정상에 서면 맞은바라기로 구례읍으로 달리는 견두산 줄기가 기다랗게 뻗어 내려오고 산동의 탑동마을과 건너편 효동마을이 아스라하다.

구리재는 구렁이를 뜻하는 ‘구리’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재에 오르는 길의 생김새가 구렁이가 움직이는 것처럼 구불구불 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난동 갈림길에 들어선 뒤 길은 열 두 세 차례 이상 휘어지고 꺾어진 뒤에야 비로소 재빼기에 닿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산동까지는 내리막 길로 5km 가량 남겨 놓고 있다.

내리받이 역시 구렁이 지나듯 구불구불 굽돌이길이다. 임도를 타고 가는 길에 지리산 구례수목원으로 가는 곁길이 숲으로 이어진다. 난동-산동 구간의 유일한 숲길이다. 1km쯤 되는 거리를 숲길은 계곡과 함께 흐른다.

혹여 숲길을 지나쳐 임도를 타고 내려와도 무방하다. 임도는 지리산 구례수목원에 닿기 전 기후변화테마원과 종자연구소를 지나 계류생태원에서 숲길을 끌어들인 뒤 탑동마을로 내려간다.

낙엽 쌓인 숲길은 바스락 거리고 길 따라 흐르는 계곡물은 수정처럼 맑아 모래알을 셀 수 있을 것만 같다. 넓은 임도를 걸으며 무료함에 끄집어내었던 화두 따위는 다시 집어넣어도 좋을 만큼 숲길은 상큼하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탑동마을의 돌탑


산수유나무에 매달린 루비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만나는 구례수목원은 야생화생태공원을 겸하고 있으나 계절은 꽃이 지고 잎도 지는 시간, 어느 봄날을 기약할 수밖에 도리 없다. 대신 탑동마을로 가는 길에 수확의 손길을 비껴간 산수유 열매가 보석으로 매달려 길손의 아쉬움을 달랜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은 루비가 된 산수유 열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태풍과 천둥과 벼락과 무서리와 땡볕과 초승달을 품은 산수유 열매는 루비를 닮았다.

계류생태원 건너편의 쉼터 아래로 탑동마을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서고 바람칼을 세운 솔개는 구름 낀 하늘을 빠르게 가른다.

구리재를 넘어 처음 만나는 탑동마을은 지리산온천랜드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한 마을로 ‘탑이 있는 마을’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구간의 종점인 산동면사무소와 2km 가량 떨어져 있다.
효동마을에서 바라 본 탑동마을 전경. 마을뒷산이 구리재를 넘어 온 지초봉이다.


탑동마을에 들어서면 마을의 상징인 돌탑이 울타리에 둘러싸여 보존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 될 뿐 3층석탑인지 5층석탑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채 방치된 돌탑을 마을 사람들이 최근에 다시 세웠다.

마을 앞으로 만복대에서 발원한 서시천이 구례읍을 향해 남쪽으로 흐른다. 길은 서시천을 가로 지르는 효동교를 건너 서시천을 따라 걷다 산동면사무소에서 구간을 마무리 한다. 지리산둘레길의 마지막 구간인 산동과 주천구간이 산동면사무소에서 시작된다.

묵어간다면 탑동마을에서 모텔이나 민박을 이용해도 좋다. 산동의 온천수로 피로를 씻은 뒤 흑돼지 요리에 산수유 막걸리 한 사발이면, 까짓것 세상살이 별거냐 싶다.시민전문기자 kanjoys@hanmail.net



길 안내

난동정류장- 난동갈림길(0.7km)- 구리재(3.5km)- 탑동마을(3.7km)- 산동면사무소(1.6km)까지 9.5km에 달한다. 난동갈림길에서 구리재까지의 임도는 가풀막지고 자동차 두 대가 지날 만큼 넓어 산속의 신작로길 같다. 오르막 치고는 힘들지 않지만 따분할 수 있다. 소요시간은 3시간 정도면 가능하다.

구례버스터미널에서 남원방면으로 가는 시외버스나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난동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1시간에 1대 정도 오간다. 산동에서 구례버스터미널로 되돌아오는 버스도 1시간에 1대 정도 있다. 산동농협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고 정류장에서 택시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산길을 걸으며 내부의 풍경보다 외부의 풍경을 관찰하고 싶다면 겨울철은 적당하지 않다. 산수유 꽃 피는 춘삼월이나 산수유 열매 주렁주렁한 늦가을이 제격이다.

탑동마을과 산동면소재지인 원촌마을, 또는 지리산온천랜드 등에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즐비하다. 숙박업소에서는 대부분 지리산 온천수를 사용하고 음식점에서 먹는 산수유 막걸리는 일품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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