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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의 지리산둘레길을 가다(19) 오미-난동
온동의 흐르는 전설은
산동에서 현실이 되고…
강은 군데군데 풀등을 만들어
쉬어가고 우거진 갈대숲에서
겨울 햇살은 잘게 부서진다.

풀등이나 갈대숲 어디쯤에 볕뉘를
즐기는 수달 한 마리쯤 있을까 싶어
두 눈을 가늘게 떠보지만….

묻어야 할 것은 병든 닭이 아니라
생명을 이윤으로만 보는
인간의 병든 마음과
무능한 뒷북행정임에도
우리는 애먼 닭 모가지를 비튼다.

인기척에 길 아래 사육장의 개들이 울더니 갈대밭에서
고라니 한 마리 뛰쳐나와
또가닥 또가닥’ 발굽소리를 내며
내달리다 이내 사라진다.
서시천에서는 무리지은
흰뺨 검둥오리가 헤엄을 치거나
모래톱 바위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

갈대숲은 무성히 자라
물 흐름을 가리고
벚나무 가로수의 앙상한 가지 사이로
오가는 새들의 날갯짓은 분주하다.
입력시간 : 2016. 12.30. 00:00


강은 오봉산의 자락을 적시며 하동으로 흐르고, 둘레길은 섬진강 둑길을 따라 구례읍 방향으로 이어진다. 간밤의 먹이사냥을 끝내고 어디쯤에서 쉬고 있을 수달 가족의 안녕을 빌며 길을 간다.
이틀 전 첫 눈이 내렸으나 아침 햇살속의 노고단은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시치미를 뗐다. 숫눈이 쌓인 산하를 걸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날 선 바람이 대신했다.

길은 운조루 유물전시관의 주차장에서 곡전재를 지나 하동방면으로 가는 19번 국도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들녘 한 가운데 자리한 원내마을을 경유하여 섬진강을 향해 직진하는 길이다.

강은 오봉산 자락을 적시며 하동으로 흐르고, 길은 섬진강 둑길을 따라 구례읍 방향으로 간다. 강둑에 올라서면 둘레길 이정목과 함께 ‘섬진강 수달서식지 생태 경관보존지역’이라고 쓰인 커다란 입간판이 길 안내자처럼 반긴다. 우리나라 4대강중 유일하게 1급수를 유지하고 있는 섬진강의 생태계를 입간판에서 읽는다.

강은 군데군데 풀등을 만들어 쉬어가고 우거진 갈대숲에서 겨울 햇살은 잘게 부서진다. 풀등이나 갈대숲 어디쯤에 볕뉘를 즐기는 수달 한 마리쯤 있지 않을까 싶어 두 눈을 가늘게 떠보지만 애시당초 기대할 일이 못됐다. 물오리 몇 마리만 물위에 뜬 고무풍선처럼 강물 따라 떠내려가고 있다.

수달은 조선시대만 해도 전국의 하천 곳곳에서 볼 수 있었으나 환경오염과 가죽을 얻으려는 인간의 포획으로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종족의 유전자를 간신히 이어가고 있다. 간밤의 먹이사냥을 끝내고 어디쯤에서 쉬고 있을 수달의 시간이 안녕하길 바라며 길을 간다. 어쩌면 갈대숲에서 수달이 길손의 안녕을 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 철새가 찾아드는 서시천에는 갈대가 무성히 자라 물 흐름을 가리고 건너편에는 가는 길 내내 노고단이 동행한다. 서시천길은 구만마을까지 10여 km에 달한다.




물고기도 가라앉는 서시천길



제방둑을 걷던 길은 강으로 한 걸음 더 내려선 뒤 대숲사이로 난 데크길로 이어지다 용호정을 만난다. 망국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경술국치에 자결한 매천 황현선생의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용호정을 지나 차도로도 이용되는 포장된 섬진강 둑길에 올라서면 강은 치마폭을 한껏 펼친다. 넓은 강에 맑은 하늘이 담기고 강물은 더욱 푸르다.

강물 같은 하늘에서 패러글라이더가 바람을 타고 독수리처럼 내려와도 수중보 위에서 해쪼이에 열중인 수 백 마리의 겨울 철새는 미동도 않는다. 하늘을 나는 날개의 정체를 철새들이 알고 있음이라.

한 시간쯤 걷다보면 섬진강은 지류인 서시천을 합류하여 흐르고 길은 서시천을 따라 꺾어진다. 섬진강을 바라보는 시야의 끝에 구례읍과 문척면을 잇는 문척교가 아스라하다. 세심정까지 25리길에 달하는 서시천길의 시작점이다. 두 눈은 섬진강을 그만 내려놓고 노고단 능선을 새롭게 받아들여 기나긴 길을 간다.

지리산의 만복대에서 발원하여 섬진강으로 스며드는 서시천(西施川)은 구례분지의 젖줄이자 청둥오리, 흰뺨 검둥오리, 비오리, 고니, 왜가리, 백로 등 수많은 철새와 텃새의 낙원이다. 이따금씩 수달과 은어도 섬진강이 무료해지면 찾아들곤 한다.

‘강물의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도 잊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을 만큼 아름다웠다’는, 그리하여 ‘침어(沈魚)’라고도 불리는 서시(西施)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미인은 물고기에게도 치명적 유혹인가보다.

그런가 하면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강물을 거슬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서불(西巿)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서시’로 발음되면서 서시천으로 부르게 됐다고도 한다.

자전거산책로를 겸한 서시천길에는 철따라 벚꽃과 원추리꽃, 코스모스꽃 등이 장관을 이루지만 계절은 서시도 눈살을 찌푸릴 섣달의 끝자락, 천변의 마른 갈대를 꽃 본 듯이 할 뿐이다.




텅빈 축사엔 통곡소리만



길은 서시교를 건넌 뒤 구례읍 번화가의 동편 외곽을 타고 구례공설운동장과 지리산둘레길 구례안내센터를 지나 서시천과 손잡고 간다. 가는 길 내내 오른쪽으로는 서시천 너머 노고단 능선이 뻗어 내려오고 왼쪽에서는 구례 들녘을 지나 순천-완주 고속도로가 견두산 줄기의 허리를 타고 숨 가쁘게 달린다.

조류인플루엔자(AI)의 재앙은 지리산 산골마을도 예외 없이 휩쓸고 지났다. 길옆 비닐하우스로 지어진 닭과 오리의 축사는 텅 비어 스산하다.

아침 신문에서는 사상 최악의 AI로 닭·오리 1,467만9,000 마리가 살처분됐다고 했다. AI확진 판정이 나면 반경 3km이내의 닭과 오리는 모두 죽인다고 덧붙였다.(1주일 뒤 살처분된 가금류 2,614만 마리로 늘어났다). 활자는 단호했고 숫자는 건조했다.

소련의 스탈린이 독재자다운 명언을 남겼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명의 죽음은 통계다”. 독재자의 말처럼 생매장된 1,500만 마리의 주검은 통계일 뿐인가. 진열대의 물건을 치우는 것과 학살을 등가로 여기는 사회는 생명 앞에 무죄인가 묻고 싶어졌다.

어쩌면 우리는 내년 이맘때 오늘과 똑같이 반복되는 대량학살을 지켜보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거의 그럴 것이다. 묻어야 할 것은 병든 닭이 아니라 생명을 이윤으로만 보는 인간의 병든 마음과 무능한 뒷북행정임에도 우리는 애먼 닭 모가지를 비튼다.

닭과 오리가 떠난 축사에서 바람이 통곡소리처럼 운다. ‘1,500만 마리의 살처분’이 통계라면 나는 오직 한 마리의 비명만을 기억하고 싶다.

인기척에 길 아래 사육장의 개들이 울더니 제방 갈대밭에서 고라니 한 마리 뛰쳐나와 ‘또가닥 또가닥’ 발굽소리를 내며 내달리다 이내 사라진다. 서시천에서는 무리지은 흰뺨 검둥오리가 헤엄을 치거나 모래톱 바위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



솥뚜껑으로 막은 온천수



자연은 생명을 키우고 생명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개별적인 목숨은 하찮을 수 없고 생명의 소중한 가치는 죽는 순간까지 지켜져야 한다. 통계가 삶과 죽음을 대변하는 시대는 건조하고 또 춥다. 둑길은 논바닥 보다 높아 바람이 더욱 차고 노고단에서 내려오던 햇살도 바람에 날린다.

길은 광용교 건너 광의면소재지인 연파마을을 지난 뒤 면사무소를 거쳐 구만마을로 향한다. 서시천 갈대숲은 무성히 자라 물 흐름을 가리고 벚나무 가로수의 앙상한 가지 사이로 오가는 새들의 날갯짓은 분주하다.

둑길이 끝나는 곳에 헌 다리와 새 다리의 ‘구만교’ 2개가 나란히 서시천을 가로지르고 에둘러 오르는 숲길 벼랑에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정이 놓여있다. 온천과 저수지 개발로 수량이 줄어든 서시천 상류의 얕은 물과 선바위들이 세심정의 이름값을 하느라 벅차다.

길은 잠깐의 세심정 숲길을 나와 서시천과 헤어져 수력발전으로 이용되는 구만저수지와 우리밀체험장을 지나 마침내 목적지인 난동마을로 향한다.

난동마을에 닿기 전 우리밀체험장을 지나면 노고단으로 오르는 산골에 터를 잡은 온동마을을 만난다. 골논계라는 골짜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온천수로 인해 전국의 나병 환자들이 몰려들자 솥뚜껑으로 샘을 막아버렸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마을이다. 안타깝게도 온천수의 근원을 막아버린 솥뚜껑을 찾을 수는 없지만 산하나 넘어 인근 산동에서 온천수가 솟는다. 온동의 전설이 산동에서 현실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나병환자들을 외면했던 솥뚜껑의 전설은 매정하다.

지리산둘레길은 오늘 하루, 사라지고 죽어가는 목숨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다. 내일의 길에서는 생명의 기쁨을 만났으면 좋겠다./시민전문기자 kanjoys@hanmail.net

길 안내

오미- 섬진강둑길(0.7km)- 용호정(1.1km)- 서시천 갈림길(2.5km)- 서시교(1.5km)- 둘레길구례안내센터(0.4km)- 연파마을(7.0km)- 구만교(1.8km)- 구만저수지(0.9km)- 온동마을(1.6km)- 난동마을(1.5km)까지 19.0km에 달한다. 구간은 길지만 평지 길로 소요시간은 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교통편은 오미- 방광- 난동 구간과 동일하다.

지난번 오미에서 방광을 거쳐 난동마을로 가는 길과 달리 이번 길은 오미에서 구례읍을 지나 난동으로 가는 구간이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단위로 걷기에 알맞다.

크게 섬진강길과 서시천길로 구분할 수 있다. 가는 길 내내 노고단을 조망하며 섬진강이나 서시천의 흐름과 강에 깃든 철새와 텃새를 관찰하는 것도 구간의 솔찬한 게미다. 구례읍과 광의면소재지인 연파마을에서 식사를 하거나 음료를 살 수 있다.



매천(梅泉) 황현


‘나는 벼슬하지 않았으니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500년간 사대부를 길렀는데 망국의 날에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한일합방을 통탄하며 자결한 매천의 유서 일부분이다.

경술국치를 맞아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이 없는 시골의 선비 한 명이 ‘나라가 망한 지금 선비 하나는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나라의 자존심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그는 또 절명시를 통해 ‘秋燈掩卷懷千古(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을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라고 한탄했다.

대통령이 국가의 부끄러움인데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부끄러운 대통령 밑에서 권세를 누렸던 권력자들 가운데 부끄러움으로 사직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음을 국민들이 부끄러워하는 2016년의 부끄러운 대한민국이다. ‘글 아는 사람의 노릇’이 소인배의 재테크로 바뀐 지 오래이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시대는 진정 나아가는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부터 16일째 되던 날 밤, 구례의 광의면 자택에서 매천은 아편덩어리를 소주와 함께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말한 ‘글 아는 사람 노릇’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글 아는 사람의 노릇’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글 아는 노릇’이 참으로 가볍고 쉬운 시대다. 1962년 정부는 매천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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