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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진의 광주전남 문학지도 그리기문학은 사랑이다21 : 천생의 시인, 시의 일상(上) - 고동치는 시를 품고, 바위처럼 시대를 견뎌낸 시인 문병란
입력시간 : 2016. 12.26. 00:00


잡것들과는 아예 상대하지 않는, 타고난 청정함의 시인

문병란 선생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궁핍하게 살던 집으로

친한 친구가 굳이 따라와

윗방 아버지의 한약도구를 보고

자신을 ‘약방의 감초’라고 놀렸다

아버지를 모독한다는 생각에

그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그것은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인의 길에 접어든 초기에는

순수하고 고매한 서정의 시가

그의 일상이었다

70년대에는 삶과 민족이,

80년대에는 민중과 통일이

그의 일상이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좌·우, 순수·참여를 가리지 않고

진실한 시를 쓰고자 했다





아버지

육사가 아니라 국문과에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크게 실망하는 눈치셨다. 대학 2학년 때 최창조 선생의 '한국의 풍수'를 생신 선물로 사다 드렸다. 재미있게 읽으셨다. 한참 후 시골에 내려갔더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저기 멀리 뾰족하게 솟아 있는 천태산은 틀림없는 필봉(筆鋒)이다. 우리 집은 장군보다는 글쟁이가 나오는 자리다.” 아버지께서는 이제나저제나 나의 등단 소식을 기다리셨다.

문병란 선생은 화순 도곡면 원동마을에서 1934년에 태어났다. 나는 그 원동마을을 아침저녁으로 지나 광주를 오가고 있다. 원동마을의 진산은 종괘산이다. 누가 봐도 신통하다 싶게 산마루에는 뾰족한 바위가 불뚝 솟아 있다. 이 바위를 향한 바람은 다양하다.

도곡온천이 개발되던 초기에 가장 유명했던 곳은 3층짜리 도곡원탕이었다. 특히 201혼가는 아들을 원하는 젊은 부부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유는 이 방 창문으로 종괘산의 고동바위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고 싶어서 이 방에 드는 부부는 고동바위를 ‘남근석’이라고 굳게 믿었다.

문병란 선생이 친형제처럼 돈독하게 지내는 두 살 아래 벗이 손광은 시인이다. 손광은 시인이 이런 이야기로 ‘농’을 치면 문병란 선생은 과하게 화를 내셨다고 한다. ‘무슨 소리냐! 그 바위는 틀림없는 문필바위다. 누가 봐도 붓자루다.’ 문병란 선생의 평소 성정으로 볼 때, 너무 과도한 반응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쳤던 의문은 뒤늦게 풀렸다. 선친을 그리는 글 '외암(嵬唵)과 난초(蘭草)'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신의 아호는 외암(嵬岩)인데, 소자의 본명 병란(炳蘭)이란 작명하심은 무슨 뜻이 있었던가 헤아려 본다. 외암은 글자 모양이나 뜻 모두 크고 억세다. 고향 주봉 종괘산 산봉에는 ‘쌍괘함’ 또는 ‘장군암’ ‘고동바위’ 등으로 불리는 큰 기암이 솟아 있고 <중략> 그렇다면 그 큰 바위에 어울리는 운치로는 단연 난초가 으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외남 곁에 난초라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독자들로부터 나의 본명인 여성적인 글자 난초난(蘭)자에 대한 시비가 간간히 일게 되는 그 오해의 소지를 무릅쓰고 굳이 그 고운 글자를 쓰신 연유를 속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문병란 선생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던 것 같다. 선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주 서석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궁핍하게 살던 집으로 친한 친구가 굳이 따라와서 윗방 아버지의 한약도구를 보고 간 후 자신을 ‘약방의 감초’로 놀렸던 모양이다.

커다란 배신감 같은 울분을 느꼈고 특히 아버지를 모독한다는 생각에 그에게 절교를 선언, 일체 말을 걸지 않기로 작정해 버렸다. 그것은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바위를 ‘남근석’이라며 농을 친 손광은 시인이 절교 선언을 당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의 우애가 그 만큼 깊었던 까닭이겠다.



문필봉의 청정

문병란 시인을 ‘문필봉의 시인’으로 부른 이는 스무살 연장인 이기형 시인이다. 시인은 80년대 중반에 종괘산에 올라보고 싶어 원동을 직접 찾기도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82년이었다고 이기형 시인은 회고한다.



문병란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게 된 것은 1982년 여름이다. 그때 내 첫 시집 '망향'을 보내라고 신경림 선생께서 문인주소록에 표시해 준 이름 가운데 문병란이라는 이름이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한테서 곧 편지가 왔다.



80년 오월을 대표하는 문인을 두 사람만 들라고 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문병란과 송기숙을 들겠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이름 때문에 오해를 산 일이 많았다고 한다. 소설가 황석영은 '난과 청죽'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이전에도 간혹 잡지에서 그의 시와 이름을 대한 적이 있었고, 거 참 이름도 예쁜 여류 시인이 시는 되게 씩씩하구나 하며 기이하게 여겼던 터였다. 도대체 동숙의 노래로 유명짜한 가수의 이름과 흡사한 병란이라는 이름을 어찌 근엄한 대장부의 이름으로 알겠는가. 이름 타령을 하자면야 송기숙이라는 양반도 또한 입에 오르내릴 만한 것이다. 내가 알기에도 두 분 모두가 문학청년 시절에 글을 발표하면 사방에서 연애편지가 몰려들어 애를 먹었다.



여러 면에서 인연이 깊은 송기숙 선생은 문병란 시인을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시인’이라고 말한다.



광주민중항쟁 때 지하실에 있는데 누가 또 오는 것 같아 수사관이 잠깐 자리를 뜬 사이 문틈으로 내다봤더니 문병란 씨였다. 몹시 반가웠다. 그런 험한 자리에 끌려왔는데 반갑다니 그런 무자비한 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험한 델수록 친구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어야 마음이 놓이니 반가울 수밖에. 그가 나보다 먼저 나갈 때 잘 됐다고 느껴지기보다 몹시 섭섭했던 것도 똑같은 심정에서였다. 문병란 씨는 이렇게 만나려니 하는 자리, 그러니까 있어야 할 자리에는 늘 있어 어김없이 만난다.

송기숙 선생은 문병란 선생을 잡것들과는 아예 상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문병란 선생은 확실히 ‘잡것’을 못 견뎌 하는 ‘청정함’을 타고난 것 같다.



천생 시인, 일상 시인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일상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반사(茶飯事) 즉 먹고사는 것, 여기에 더해 시를 쓰는 것까지 일상으로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에서 체면을 차리는 일이 많다. 대학교수를 집어 던지고, 입시학원 강사를 하던 문병란 선생에게도 이런 잣대를 들이대는 이가 없지 않았다. 송기숙 선생은 이를 세속적 관념이라고 꼬집는다.



문병란 씨쯤 되면 교육계에 있더라도 대학 같은 데 있을 법한 데 그는 지금 학원 강사다. 대학이란 게 지금 거기가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가를 따지기로 하면 이런 소리 하는 나 스스로가 가장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회적 관념이 그렇다는 것이다. 안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한때 대학에 있었다. 그런데 몇 년도 안돼 걷어차고 나와 버렸다. 학원보다 남보기에 나은 곳이라는 생각하는 곳이 대학일 게다. 그러니까 그는 대학이 아니라 이런 세속적인 관념을 걷어차 버린 것이다.



문병란 선생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 중에는 그의 다작을 탓하기도 한다. 시 쓰는 것이 일상이라면 가장 자연스러우면 된다. 작품을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일상을 가꾸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스물다섯 권이 넘는 시집과 십수 권에 이르는 산문집은 유별나게 쓴 작품집이 아니다. 선생이 살아가신 삶, 일상이 고스란히 담겼다. 시인의 길에 접어든 초기에는 순수하고 고매한 서정의 시가 그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70년대에는 삶과 민족이, 80년대에는 민중과 통일이 그의 일상이었다. 90년대에는 민주와 시가 일상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대학에 복직하고 2002년에 정년퇴임을 한다. 그 즈음에 그의 일상은 ‘진실한 시’가 되었다. 2000년대 이후 문병란 시인은 좌·우, 순수·참여를 가리지 않고 진실한 시를 쓰고자 했다. 이런 선생의 행보를 달갑지 않게 여긴 젊은 문학가들이 없지 않았다. 나도 한때는 거기에 동조하는 부류에 속했다. 그리고 10여년이 흐르고 나는 일상의 가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다. 그 고민 속에서 다시 만나 본 문병란의 문학은 새로운 빛으로 발하며 다가오고 있다.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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