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눈부시게 고왔던
꽃잎이 지고 잎마저 버려야 하는 시간,
십리벚꽃길은 이제 사랑을
떠나보내고 있는 중이다.
늙은 벚나무의 색 바랜 잎이
꽃보라처럼 날리고 있다.
작은재는
경남과 전남의 경계지점으로
하동의 화개면과
구례의 토지면을 나눈다.
고갯마루에는
황장산을 비롯하여
피는 날이 있으면 지는 날도 있고 꽃이 져야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던 길이다. 오가는 계절의 순환은 두려웠고 버려지지 않는 인간의 탐욕은 가여웠다.
모과 열매는 가을볕에 떨어져 길섶에 뒹굴고 은행나무들은 노란색 크레용으로 가을 편지를 쓰고 있다. 길옆의 낡은 흙집은 사립도 없고 주인도 없는데 장닭의 벼슬을 닮은 맨드라미만이 마당에서 제 홀로 붉다. #그림1중앙#
으레 그렇듯이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 주변에는 허름하지만 근사한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기 마련이다. 화개터미널 근방에는 그런 식당이 서 너 군데 있다. 숙소와 인접한 식당에서 해장을 겸한 다슬기 국으로 속을 달랜 뒤 구간의 시작점인 가탄마을로 향했다. 해뜰참은 지났으나 동살이 잡힌 들녘은 푸르스름했다.
화개천이 기지개를 켜는 이른 아침, 부지런한 농부가 트랙터를 몰고 나와 나락을 수확하고 있다. 뒤따르는 농부의 아낙이 쓰러진 나락을 한 아름씩 묶어내고 늙은 아비는 볏단을 경운기에 실으며 일손을 보태고 있다. 농부 일가족의 역할분담에서 일상화된 노동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길은 가탄마을 앞 가탄교에서 화개십리벚꽃길을 가로질러 화개초등학교 옆 법하마을로 들어선다.
화개십리벚꽃길은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4km에 걸친 벚나무 가로수 길을 일컫는다. 일제 때 신작로 개설과 함께 조성됐다. 벚꽃이 만개한 날에 이 길을 걸으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한다 하여 ‘사랑의 길’ 또는 ‘혼례의 길’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계절은 눈부시게 고왔던 꽃잎이 지고 잎마저 버려야 하는 시간, 십리벚꽃길은 이제 사랑을 떠나보내고 있는 중이다. 늙은 벚나무의 색 바랜 잎이 꽃보라처럼 날리고 있다.
화개천을 내려다 보는 법하마을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엔 사하촌이었다고 한다. 마을을 형성할 만큼 영화롭던 사찰은 오간데 없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탑동산의 10여기 돌탑만이 마을 뒷산 길목을 지키고 있다.
탑동산에서 작은재로 이어지는 숲길엔 야생녹차가 숲을 이루고 차나무는 소박한 꽃을 피어 머리에 얹었다. 차꽃은 가난한 집안의 며느리가 이고 온 이바지를 닮았다. 숲길에 소슬바람이 스쳐 지나고 낙엽은 나비처럼 난다. #그림2중앙#
하동과 구례를 나누는 작은재
편백나무 숲과 시누대가 울창한 대숲길을 지나 길은 작은재에 닿는다. 화개터미널에서 출발한 지 1시간 30여분쯤 지났다. 목적지 송정마을까지는 8.8km를 남겨놓고 있다.
작은재는 경남과 전남의 경계지점으로 하동의 화개면과 구례의 토지면을 나눈다. 고갯마루에는 황장산을 비롯하여 촛대봉, 구례, 화개장터 등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어지럽다.
작은재에서 구례로 넘어와 길목 초입의 나무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지나왔던 지리산둘레길의 구간들이 뒤죽박죽 스쳐 지난다. 지난 4월의 초봄, 전북 남원 주천면에서 시작했던 길이다. 남원을 지나 함양, 산청, 하동을 거쳐 마지막 구례 구간에 들어섰다.
시간과 풍경들이 엊그제 같은데 헤어보니 많은 시간이 흘렀다. 꽃이 피었다 지고 꽃자리에 맺혔던 열매들도 떨어졌다. 피는 날이 있으면 지는 날도 있고 꽃이 져야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던 길이다. 오가는 계절의 순환은 두려웠고 버려지지 않는 인간의 탐욕은 가여웠다.
그 길들을 걷고 또 걸어 구례 구간에 닿은 것을 환영이라도 하듯 건너편 잡목 속에서 때 아닌 진달래 한 송이가 가을바람에 피어나고 있다.
하동에서 작은재에 오르는 숲길은 가파른 반면 작은재에서 구례로 넘어가는 숲길은 완만한 내리막으로 걷기에 편하다. 저만큼서 해쪼이 하던 다람쥐 한 마리가 놀라 내달리다 되돌아서 길손을 빠꼼이 쳐다본다.
숲은 깊어 금방이라도 산짐승이 헐떡이며 달려나올 듯하다. 멧돼지의 흔적일까. 파헤쳐진 숲길은 산짐승이 방금 지나갔는지 아직 마르지 않아 촉촉하고 발자국은 떼 지어 흔적을 남겼다. 낙엽위의 까만 똥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표시일 것이다.
‘우리 만나지 않길. 우연히 만나더라도 서로 모르는 채 제 갈길 가기…’ 헛기침으로 나의 존재를 알리며 숲길을 간다. #그림3중앙#
노란색 크레용으로 쓰는 가을 편지
작은재에서 오르내리는 숲길을 따라 30여분 가다 보면 길은 수십 그루의 고사목이 단지를 이루고 있는 기촌마을 윗 동산의 언덕빼기에 올라선다. 아시겠지만 산길을 가다 시야가 트이면 숨이 트이고, 숨이 트이면 마음도 트인다. 발아래 섬진강이 실타래를 풀어 놓은 듯 흘러가고 맞은바라기의 즐비한 펜션들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길은 밤나무 과수원길을 따라 20여분간 내려가다 기촌마을의 외곡교회 앞에서 섬진강의 반대편인 오른쪽차도로 이어져 추동교를 지난다. 다리 아래로 피아골 계곡물이 섬진강으로 서둘러 흐른다. 가풀막진 임도를 타고 오르는데 교회의 종소리가 뒤따른다. 조용한 산골 마을에 울려 퍼지는 교회의 종소리는 깊고 여운이 길다. 11시가 되어 가는가 보다.
임도는 가파르다. 40여분 걸어 1km를 겨우 가는 된비알길이다. 가는 길에 작은 개울 옆으로 고로쇠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쉬어 가기를 권한다. 고로쇠 수액은 추동마을의 주된 소득원 가운데 하나다. 얇은 개울의 맑은 물살이 기운차다.
골 따라 오르는 길은 하늘이 맞닿는 곳 까지 이어지고 하늘아래 산골마을에서 계절은 가을 깊숙이 들어선다. 모과 열매는 가을볕에 떨어져 길섶에 뒹굴고 은행나무들은 노란색 크레용으로 가을 편지를 쓰고 있다. 길옆의 낡은 흙집은 사립도 없고 주인도 없는데 장닭의 벼슬을 닮은 맨드라미만이 마당에서 제 홀로 붉다.
고개 하나를 다 오를 즈음, 임도는 오른쪽으로 자기 길을 말없이 가고 지리산둘레길은 왼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산을 오른다. 산길은 섬진강과 오리 길의 흐름을 함께 한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섬진강이 넓은 치마폭을 펼쳐 보이고 강의 끄트머리에는 화개장터의 남도대교도 걸려 있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의 푸른 물결을 왼편에 세우고 목아재로 넘어 가는데 맑은 하늘에 슬그머니 여우비가 지난다. 경치 좋은 날에 호랑이가 장가라도 가는가 보다. #그림4중앙#
전설 하나 만들며 가는 길
목아재는 구례의 외곡리에서 화개의 범왕리로 넘어가는 큰 고갯길이자 당재와 화개재를 넘어 뱀사골로도 이어진다. 지리산둘레길의 지선인 ‘목아재- 당재’ 구간이 고갯길을 따라 시작된다. 목적지인 송정마을은 목아재 고갯길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선다. 송정마을까지는 3.4km에 달하는 산길이다.
목아재에서 산길로 접어들다 보면 커다란 두꺼비 모양의 바위를 볼 수 있다. 두꺼비 한 마리가 또 다른 두꺼비를 등에 업고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마음속에 모성애와 효성의 이야기 하나 지으며 지난다.
어머니를 등에 업고 섬진강으로 내려가고 있는 두꺼비 바위는 효성이 부족한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 실눈을 크게 뜨고 찾아 볼 일이다.
목아재에서 송정으로 이어지는 3.4km의 길은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산의 남서쪽 허리를 감아 돈다. 숲길엔 한 길이 넘는 진달래가 무성하다. 사람에 치이지 않고 춘삼월 꽃구경하기에 제격일 성 싶다.
목적지인 송정마을은 여순사건 때 소실된 뒤 정착사업으로 다시 조성된 아픔을 안고 있다. 지금은 별장과 펜션이 계곡을 따라 줄지어 들어섰다. 마을 뒤로는 노고단 줄기가 뻗어 내려오고 맞은바라기에는 섬진강 건너편의 백운산이 우람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
길 안내
화개터미널- 법하마을(2.0km)- 작은재(1.1km)- 기촌마을(1.9km)- 목아재(3.4km)- 송정마을(3.4km)까지 11.8km에 달하는 구간이다.
경남 하동의 화개면에서 전남 구례의 토지면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섬진강과 가는 길 내내 나란히 달리는 산의 능선을 타게 된다. 구례로 넘어와 처음으로 만나는 기촌마을에서 추동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전체적인 난이도는 중간쯤으로 6시간 정도 소요된다.
기촌마을과 송정마을에 펜션위주의 숙박시설이 많다.
화개버스터미널(055- 883- 2793)에서 내려 법하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들머리 삼으면 된다. 구례버스터미널((061- 780- 2730)에서 법하마을과 인접한 가탄마을로 갈 수도 있다. 구례버스터미널에서 가탄마을까지는 하루 7차례의 버스가 운행한다. 소요시간은 30분 정도다.
승용차로 광주에서 화개버스터미널까지는 1시간 30분쯤 소요된다. 구간의 종점인 송정마을에서 화개버스터미널까지 되돌아갈 경우 택시 요금은 1만원이다.
두꺼비 바위의 전설
아주 오래된 옛날, 외곡리의 한 마을에 일흔이 넘어 거동이 불편한 노모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가난한 아들은 삶의 고단함을 견디다 못해 노모를 산에 버리기로 했다.
아들이 노모를 업고 목아재를 넘어가는데 등에 업힌 어머니가 자꾸 나뭇가지를 꺾었다. 아들이 까닭을 물었다. “애야, 네가 이 깊은 산중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 봐서 표시를 해 둔거다.” 그때서야 크게 뉘우친 아들은 노모를 업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는 길에 아들이 발을 헛디뎌 그만 노모가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비탄에 빠져 통곡하던 아들이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노모 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자는 두꺼비 바위로 환생했다. 아들은 여전히 노모를 등에 업고 지금도 마을로 엉금엉금 내려가고 있다.
아들이 통곡하며 흘린 눈물이 섬진강이 되었다. 그 때부터 모래가 많아 다사강(多沙江)으로 불리던 강이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蟾津江)으로 불리게 됐다. 시민전문기자kanjoys@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 때아닌 가을에 폭염주의보? 역대 가장 더운 9월 중순 무등일보 DB. 최근 광주·전남지역에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9월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등 11년 만에 가을폭염이 관측됐다.18일 광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기상청은 지난 16일 광주와 담양에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폭염주의보가 나주와 화순까지 확대됐다.폭염주의보 첫날인 16일 광주 낮 최고기온은 31.3도로 평년 기온(26.9도)보다 4.4도 높았다.이튿날인 17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3.5까지 높아져 평년 기온(27도)과 6.5도 차이가 났다.특히 18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4.5도까지 치솟아 9월 중순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전까지 9월 중순의 최고기온 기록이던 33.7도(1998년 9월 19일·2008년 9월 18일·2008년 9월 19일)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광주지역에서 9월 중순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이번이 관측 이래 네 번째다. 지난 1998년에 처음으로 '한가을 폭염'이 나타난 데 이어 2008년과 2011년에도 9월 중순까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기상청은 한반도 주위의 고기압에 의해 따뜻한 기류가 유입되며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 아래쪽에는 여름 기단인 북태평양 고기압이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고 태평양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우리나라로 불어놓고 있다. 동해상에는 또 다른 고기압이 자리를 잡고 한반도 서쪽 지방에 더운 공기를 유입시킨다.여기에 18일에는 햇살을 막아주던 구름까지 걷히면서 폭염지수를 더욱 높였다.기상청 관계자는 "고기압이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남해상에서 태풍 '난마돌'이 북상하면서 뜨거운 수증기를 몰고왔다"며 "태풍이 지난 후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며 본격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질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폭염주의보는 폭염특보의 한 종류로 이틀 이상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3도를 웃도는 등 더위로 인한 큰 피해가 예상될 때 발효된다. 이전까지는 기온을 기준으로 폭염특보를 발령했으나 지난 2020년부터는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고려하는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안혜림기자 wforest@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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