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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의 지리산둘레길을 가다 (15)원부춘- 가탄
삶이 그러하듯
산이 벽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계절은 어느 순간 산하를 가을로 채우고 훌쩍 떠날 테지만
시간은 여름과 가을이 함께 하고 있다.
더 머무르고자 하는
여름의 미련을
외면하지 못하는 가을이 바보 같다.”

“꽃들은 저마다
자기 빛깔과 향기로 피고 지는데
나는 어떤 향기로
꽃들의 가슴을 채울 수 있을 텐가.
스스로의 향기를 의심하며
걷는 길에 보랏빛 꽃향유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다.”

“급한 내리받이 경사는
게걸음을 강요한다.
오른쪽 게걸음으로 서너 걸음 떼다
다시 왼쪽 게걸음으로 바꿔가며 내려가는 길이다.
길과 나는 화해하지 못한 채
좌우로 토라져 간다.”

“적당히 뒤로 기울어진
나무 의자에 앉는 듯 눕는 듯
등 기대면 황장산의 듬직한 자태가
눈앞에 펼쳐지고 처마 밑에 매달린
청 황 백 녹 적의 오색 룽타(風馬)에는
영혼의 숨결인양 한 줄기 바람이 쉬어간다.”

“긴 들숨으로 강을 들여 마시고
날숨으로 산을 토해내는 여유는
고단한 여행길의 끝자락에
이른 자 만이 갖는 기쁨이기도 하다.”





입력시간 : 2016. 11.04. 00:00


'하늘호수' 쉼터에서 바라본 황장산과 바람에 나부끼는 '룽타'. 영화관의 일등석에 앉아 서정으로 가득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상강을 하루 앞둔 시월 하순은 더위의 끝자락을 차마 놓지 못하고 있었다. 숲은 아직 푸르고 단풍은 이제야 신들메를 고쳐 매고 있다. 길섶의 모과나무만이 노랗게 익은 열매를 단풍처럼 매달거나 땅에 떨궈 온 몸으로 가을을 맞고 있다.

계절은 어느 순간 산하를 가을로 채우고 훌쩍 떠날 테지만 시간은 여름과 가을이 함께 하고 있다. 더 머무르고자 하는 여름의 미련을 외면하지 못하는 가을이 바보 같다.

화개장터를 둘러본 뒤 택시를 이용, 원부춘 마을회관 앞에서 내려 시작한 길이다. 장터에는 가수 조영남의 ‘화개장터’ 노래처럼 ‘있어야 할 건’ 다 있다. 관광지를 겸한 상설시장으로 지리산에서 나는 각종 버섯이며 약초 등이 풍성하다. 비록 수족관 속이지만 은어는 날렵한 몸매로 눈부신 유영을 자랑하고 재첩국집 식탁은 아침부터 불콰함으로 채워진다. 먹거리가 풍성한 만큼, 가족끼리 나들이 삼아 나설 만하다. 지척에 있는 평사리 최참판댁과 함께 한다면 하룻길의 여행으로 부족함이 없을 성 싶다.

원부춘- 가탄 구간의 들머리인 원부춘 마을회관 앞에 서면 형제봉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과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길옆으로 흐르는 계곡은 깊고 마주하는 능선은 부드러우면서도 까마득히 높다. 더구나 치받이로 일어서는 시멘트포장 도로는 몸을 풀만한 겨를 마저 주지 않는다.

길을 가다 보면 삶이 그러하듯 산이 벽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원부춘 마을에서의 들머리가 바로 그런 벽 앞에 선 기분이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이 한 구절이다.
정금마을의 차밭아래로 섬진강이 쉬어가고 멀리 화개와 구례를 잇는 남도대교가 아스라하다. 여행길에 목적지가 보이면 새로운 힘을 얻는다.




벽을 오르는 담쟁이처럼



시는 벽 같은 산을 앞에 두고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자 최면이다. 산길이나 삶길이나 감당할 수 없어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어 포기 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기에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말없이 서두르지 않고 가다보면 하나 더 보게 되고, 하나 더 듣게 되는 담쟁이 발길도 나쁘진 않다. 나쁜 산길은 없다. 쉽거나 힘들 뿐이다. 힘든 길일수록 맥박은 요동치고 이겨낸 기억은 풍요롭다.

오르막 포장 임도는 지통골과 수정사 입구를 거쳐 형제봉 쉼터에 이르기까지 10리길에 달한다. 담쟁이처럼 가는 길에 땅에 떨어진 모과 열매를 주어 가을 내음을 맡고 길섶의 들국화 꽃잎에서 가을의 또 다른 체취를 맡는다. 산은 아직 물들지 않았지만 길손의 허파는 가을 향기로 가득 찬다.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길손은 자연스럽게 숲이 주는 향기에 취하는 버릇이 생겼다. 산초나 잰피나무의 열매를 비벼 으깬 뒤, 손에 배인 향기를 맡는 일은 이제 길 가는 즐거움의 하나가 됐다.

봄날엔 생강나무와 진달래의 꽃잎을 따서 혀끝에 올리고, 여름철엔 찔레꽃과 칡꽃의 아찔한 향기에 취하곤 했다. 햇살의 차이 일런가. 봄꽃에서는 배냇내 같은 비릿함이 섞이고 여름꽃에서는 성숙한 여인의 체취가 배어난다.

꽃들은 저마다 자기 빛깔과 향기로 피고 지는데 나는 어떤 향기로 꽃들의 가슴을 채울 수 있을 텐가. 내 안의 향기를 의심하며 걷는 길에 보랏빛 꽃향유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다.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가며 두 시간 가까이 힘겹게 오르다 보면 길은 형제봉활공장과 상훈사 방향으로 나뉘는 3거리를 지나 곧바로 형제봉쉼터에 닿는다. 들머리에서부터 시작된 오르막 포장임도가 끝나고 비로소 숲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시야가 트이면서 건너편의 지리산 능선이 내게 아는 체를 한다.
먹거리가 풍성한 화개장터의 아침 풍경 - 장터의 삶을 체험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다.




보랏빛 꽃향유가 지천으로



쉼터의 나무 의자에 앉아 화개장터에서 사온 쑥떡과 올벼쌀로 점심을 대신 한 뒤 임도를 버리고 왼쪽 숲길로 들어서는데 가을 까마귀 울음이 빈산을 울린다.

길은 조릿대가 가슴팍까지 차오르고 숲은 상수리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상수리나무는 잎을 내려보내 조릿대를 키우고 대나무는 상수리나무의 경쟁자들을 쫒아내며 담합하여 살아가고 있다.

이어지는 내리막 숲길은 깊고 가파르다. 급한 내리받이 경사는 게걸음을 강요한다. 오른쪽 게걸음으로 서너 걸음 떼다 다시 왼쪽 게걸음으로 바꿔가며 내려가는 길이다. 길과 나는 화해하지 못한 채 좌우로 토라져 간다.

가파른 내리막길은 1시간쯤 지나 ‘하늘호수 차밭’ 휴게소를 만나 숨을 고른다. 중촌마을의 윗턱에 자리한 ‘하늘호수 차밭’은 간단한 주류와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쉼터다. 첩첩산중답게 나무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깎아 살림살이를 만들고, 나무를 이용하여 손님이 앉을 의자와 식탁도 만들었다. 서울에서 살다 이곳에서 터를 잡은 지 23년째라는 주인장 내외의 수더분한 미소도 나무를 닮았다.

막걸리 한 병과 안주로 도토리묵을 시켜놓고 있는데 주인장이 마른 수건과 함께 세숫대야에 발숫물을 담아왔다. 발숫물의 배려는 유쾌한 기습이다. 손사래를 치다 주인장의 권유에 못 이겨 대야에 발을 담궜다. 서늘한 상쾌함으로 발가락들이 물장구를 치고 토라졌던 두 발이 웃으며 화해를 청한다.

적당히 뒤로 기울어진 나무 의자에 앉는 듯 눕는 듯 등 기대면 황장산의 듬직한 자태가 눈앞에 펼쳐지고 처마 밑에 매달린 청 황 백 녹 적의 오색 룽타(風馬)에는 영혼의 숨결인양 한 줄기 바람이 쉬어간다. 마치 극장의 일등석에 앉아 서정 가득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휴게소 ‘하늘호수’는 원부춘- 가탄 구간의 한 가운데 지점에 해당한다. 원부춘에서 출발하여 6.6km를 지났고 목적지 가탄마을까지 6.6km를 남겨놓고 있다.

반환점을 막 넘어서는데 중촌마을의 슬라브 집 쇠창살 대문위로 금줄이 내 걸렸다. 새끼줄에는 숯과 솔잎 등이 꿰어 있다. 빨간 고추가 보이지 않는다. 공주님이 태어나셨나 보다. 오랜만에 보는 금줄위로 ‘하늘호수’의 처마에 매달렸던 룽타의 숨결이 함께 흐른다.

가탄마을 앞으로 흐르는 화개천은 화개장터를 지나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발숫물에 물장구치고



중촌마을에서 30여분 쯤 걸어 정금마을 뒷산 언덕에 올라서면 멀리 화개장터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이 보이고 경상남도 하동과 전라남도 구례를 잇는 빨간색과 파란색 아치의 남도대교가 아스라하다.

길은 넓은 녹차밭을 지나 정금마을 3거리에서 왼쪽 오르막길로 이어져 대비마을로 향한다. 길옆 녹차밭에는 하얀 차꽃이 소담스레 얹혔다. 정금마을에는 터앝이나 남새밭에 배추나 무를 심듯 차나무를 기르고 주변에는 야생 차나무가 잡목처럼 자유롭게 자라고 있다. 인접한 쌍계사는 우리나라 차나무 시배지이기도 하다. 녹차의 본향에서 커피를 선호하는 길손의 취향이 무색하다.

정금마을에서 대비마을의 대비암까지 1km가량의 포장 도로는 원부춘 마을회관의 들머리처럼 곧추 일어선다. 목적지에 닿기 전 마지막 오름길이다. 대비암은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이 머문 곳이라 하여 이름이 유래한다. 허(許)씨의 시조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대비암에서 목적지 가탄마을까지는 밤나무가 터널처럼 길을 에어쌓는 3km 남짓의 내리막길이다. 가는 길에 만나는 백혜마을의 언덕배기에 서면 발아래로 화개골과 섬진강이 한 눈에 들어오고 황장산 등 주변의 높은 봉우리들도 길손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춘다.

강은 길고 골은 깊어 길손의 호흡도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긴 들숨으로 강을 들여 마시고 날숨으로 산을 토해내는 여유는 고단한 여행길의 끝자락에 이른 자 만이 갖는 기쁨이기도 하다.

가탄마을 앞으로는 영신봉에서 발원한 화개천이 화개장터로 흘러 섬진강으로 스며든다. 산골의 어둠은 빨리 온다. 추수를 기다리는 가탄마을 앞 들녘이 햇덧으로 푸르스름하다.

화개천 제방길을 따라 오리쯤 걸어 화개장터에 몸을 풀었다. 몸을 푸는 데는 막걸리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오늘 하루도 기적 같은 삶이다. 내 안에 꽃이 피고 꽃잎은 하늘하늘 하늘로 오른다. 화개(花開)다.

길 안내

원부춘- 형제봉 쉼터(4.3km)- 중촌마을(2.3km)- 정금마을 3거리(2.4km)- 대비암(1.0km)- 백혜마을(2.1km)- 가탄마을(1.1km) 까지 13.2km. 6시간가량 소요된다. 둘레길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가탄마을에서 화개장터까지는 화개천을 따라 논둑을 겸한 제방길로 2km가량 이어진다.

원부춘- 가탄구간은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 모두 심한 급경사로 쉽지 않다. 특히 형제봉쉼터를 지나 중촌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지리산둘레길 가운데 최고의 내리받이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광주에서 화개장터 건너편 화개터미널(055-883-2793)까지는 1시간30분가량 소요된다. 터미널 아래 화개천 고수부지에 무료 주차장시설이 마련돼 있다.

화개터미널에서 원부춘행 버스는 하루 한 번(오후 3시30분) 운행한다. 하동행 버스를 타고 가다 원부춘 마을 입구의 신기정류장에서 내려 구간의 들머리인 원부춘 마을회관까지 걸어갈 수 있다. 하지만 4km에 달하는 콘크리트 오르막길을 감안해야 한다. 택시를 이용할 경우 화개터미널에서 원부춘 마을회관까지 8천원 남짓의 미터요금이 나온다.

구간의 중간쯤인 중촌마을에 민박이 가능한 휴게시설이 있고 가탄마을에서도 민박이 가능하다. 화개터미널 부근에 깨끗한 모텔이 많다. 주변 식당에서는 참게나 은어, 다슬기, 재첩 등을 이용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화개장터를 둘러볼 수 있는 것도 원부춘- 가탄 구간의 특징이다. 조금 일찍 출발하여 장터의 삶을 체험하는 것도 유쾌한 경험이다.

시민전문기자kanjoys@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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