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진의 문학은 사랑이다

전동진의 광주전남 문학지도 그리기문학은 사랑이다 17 : 언어의 첨단과 저변 上 - 시를, 오롯이 무등산을 사랑한 시인 범대순

입력 2016.10.31. 00:00

"무등산은 나무를 키우는 산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산"

내게 시는 무등산입니다

가까이 있기도 하고

멀리 있기도 하지요

더러는 높고 깊으며

낮고 웅혼하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춘하추동이 있고

인생의 처음과 끝이 있고

나와 나의 문학이 있습니다

범대순 시인은

가장 ‘광주다운 시인’이다

가장 ‘광주스러운 시인’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에서 보낸 대학 시절과

외국 유학시절을 빼면

한 생을 오롯이 무등 아래서 보냈다

문화의 변두리인 광주에 있으면서

그는 중심을 자처하는

서울문단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그가 바랐던 것은

세계와의 소통이었다

그는 문단을 보지 않고

시만 바라보았고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오롯이 무등을 올랐다

광주에서 세계 최고

무등산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흰소리임에 틀림없다. 단서를 붙이면 말은 조금 달라진다. 150만 명이 사는 대도시에 인접한 산 중에서 1187m 무등산의 높이는 단연 세계 최고다. 무등산은 나무를 키우는 산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산이다.

이 산의 가치, 아름다움을 오래 전에 알아보고 천 번을 넘게 무등산을 오른 시인이 범대순 시인이다. 여든을 훌쩍 넘긴 노구에도 불구하고, 생을 달리할 때까지 그의 무등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이태 전 세상을 등지기 몇 달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게 시는 무등산입니다. 가까이 있기도 하고 멀리 있기도 하지요. 더러는 높고 깊으며 낮고 웅혼하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춘하추동이 있고, 인생의 처음과 끝이 있고, 나와 나의 문학이 있기도 합니다. 시가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처럼 무등산을 오르는 것도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승전결 가운데 결이며 끝입니다.” -예향(220호) 2014년 2월호

시인이 생전에 펴낸 마지막으로 펴낸 시집이 '무등산'이었다. 이 시집을 소개하고 있는 한 매체의 기사도 눈길을 끈다.

"1천100번의 무등산 산행, 160번의 서석대 등정…. 여기 숫자는 그의 말에 따르면 숫자가 아니라 스토리다.

그 속에는 무모하게 홍수를 이기려다 119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 이야기, 영하 30도 하의 서석대, 섭씨 35도 하의 산행으로 심장의 모터가 꺼질 뻔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끊임없이 산에서의 죽음을 암시한다." -광주매일신문 2013년 12월 3일 자.

범대순 시인은 가장 ‘광주다운 시인’, 가장 ‘광주스러운 시인’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에서 보낸 대학 시절과 외국 유학시절을 빼면 한 생을 오롯이 무등 아래서 보냈다.

문화의 변두리인 광주에 있으면서 그는 중심을 자처하는 서울문단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그가 바랐던 것은 세계와의 소통이었다. 그것은 중심의 무게에서 벗어나 있는 주변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그는 문단을 보지 않고, 시만 바라보았고,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오롯이 무등을 올랐다. 그 길에서 그가 얻은 것이 ‘거시기’와 ‘기승전결’이다. 거시기는 세상에 없는 말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첨단’에 해당한다. 기승전결은 세상을 풍미한 말들, 쓰임이 다한 말들까지도 품어낼 수 있는 거대한 언어의 품 즉 언어의 ‘저변’에 해당한다. 이 둘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무등산’이다. 그는 시를 통해 무등산과 같은 언어 전체를 품으면서, 안겨 본 본 몇 안 되는 시인인 것이다.#그림1오른쪽#

‘無登登’ 무등산

공간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 여기에 무늬를 새기고, 이야기를 품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의 ‘장소’를 얻게 된다. 장소는 공간을 바탕으로 삼기 때문에 공간의 일종으로, 공간의 다른 이름으로 삼기도 한다.

엄밀하게 보자면 공간(空間)은 절대 무(無)에 해당한다. 그 공간을 사물이 채우고 있다. 인간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지 않은 사물은 공간에 가깝다. 그러나 그 사물은 자체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기억을 지닌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는 시간의 표지를 담고 있다. 공간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사물에 인간의 기억이 더해지면 장소가 된다.

장소는 사물의 기억과 그 사물에 대한 인간의 기억이 중첩된 시공이다. 시간으로서의 장소는 이렇게 기억이 중첩됨으로써 선조성(線條性)에서 벗어나 품을 가진다. 품은 꽉 찬 공간이며, 선적으로 흐르던 시간이 무화된 텅 빈 시간으로서의 장소가 된다.

무등산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무등’ 곧 ‘평등’한 공간이다. 이 공간을 가장 강렬한 강도와 밀도의 장소로 만들어내는 것은 개인의 노력과 사연이다. 그러면 무등은 ‘무등등(無等等)’, 세상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오롯한’ 것이 된다. 범대순 시인은 누구의 무등산과도 견줄 수 없는 무등산을 가진 시인이다.

그는 시집 '무등산' 곳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무등산에 매번 죽어보러 가는 것입니다. 젊은 날에는 어떻게 살까 하고 올랐습니다. 어느 때부턴가는 죽으면서 올랐지요. 벌써 새로 오른 것이 90번째이니 한 100번을 채우면 그때는 죽음과 마주할 때도, 미소가 번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산이 좋아서 오르는 것은 철없을 때이다. 철이 들면서는 건강을 돌보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오른다. 물론 여전히 산이 좋아서 오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보람은 그래도 건강에서 찾게 된다. 이때까지 산은 사람들이 귀찮다. 산이 기다리는 사람은 살아서 줄기차게 죽어주는 사람이다.

하늘이 하늘에 반하는 것은

거기 천둥소리가 살고

땅이 땅에 반하는 것은

거기 사람이 살기 때문

남자가 남자에게 반하는 것은

거기 의로움이 있고

여자가 여자에 반하는 것은

거기 외로움이 있기 때문

무등산은

그 천둥소리 그 사람들

그 의로움 그 외로움

그 억만년의 생성(生成)

그 자락에 태어나

천둥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의로움을 이웃으로

여든의 나이에 또 외로움을 만났으니

사람이면서

하늘이면서 땅이면서 있는 산

그 안에 한 줌 흙으로 살아

오래 큰 바위의 꿈을 꿀거나

- 범대순, '큰 바위의 품을' 전문

#그림2왼쪽#

나와 세상과의 대화, 나와 나의 내면과의 대화, 그리고 세상과 세상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이다. 이 모든 소통이 가능한 언어, 이것이 곧 무등산 자체인 것이다. 무등을 오르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걷고, 누군가는 스치는 바위, 나무 하나 하나마다 말을 걸며 걷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함께 온 사람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기도 한다. 그 숱한 언어가 고스란히 쌓여 있는 장소가 무등산이다.

그러니 안에서 한 줌 흙이 되는 것은 죽는 일이 아니라 진짜로 ‘사는’ 일이다. 온전히 무등산에 한 줌의 흙으로 보태지고자 한 시인은 ‘큰 바위’로 자라날 것을 꿈꾼다. 1천100여 회가 넘는 산행에서 시인이 무등산에 바짝 기대 쏟은 땀방울이며 숨소리들은 고스란히 무등의 살이 되었고, 이것은 언젠가 큰 바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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