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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의 지리산둘레길을 가다 (11)위태- 하동호 구간
흔들리는 벼꽃에서 神의 미소를 본다
“흰쌀밥의 한 톨 한 톨은 가녀린 벼꽃이 온 몸으로 만들어 낸 기적들이다.
밥이고 생명이자 아름답고 성스러운 신의 미소다.
이때껏 나를 키운 것은 신의 미소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맞은바라기 능선들은 발 아래로 아득한데,
매미 울어 이명은 그치지 않고 이명으로 매미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호수는 가슴팍을 허옇게 드러내 놓고 가뭄에 기진맥진하고 있다.
새끼를 먹이느라 말라버린 짐승처럼 야위었다.”



입력시간 : 2016. 09.02. 00:00


‘정돌이’ 민박집 근방에서 바라 본 위태마을 전경. 늦여름 매미소리에 폭염 속 백일홍이 자지러지고 있다.
고백하건데 쌀도 꽃이 피어야 맺히는 열매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셀 수 없을 만큼 먹어 왔고 그 열매로 인해 목숨을 부지해 왔으면서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자연의 당연한 이치인데도 ‘벼도 꽃이 핀다’는 관념조차 갖지 못했다. 부끄러워지고 미안해졌다.

어느 날 우연찮게, 부모님도 남몰래 눈물을 흘릴 때가 있고 신음을 안으로 삼키며 아픔을 참을 때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지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당혹감이다.

위태마을에서 하동호로 넘어가는 구간의 지리산둘레길 들머리는 위태마을 정류장에서 시작된다. 일제 때 만들어졌다는 네모진 형태의 위태저수지 아래로 벼들이 자란 논들은 누르스름하거나 더러는 아직 푸르다.

그 때 보았다. 논에는 벼들이 피어 꼿꼿한데 벼마다 하얀 무엇이 붙어 있다. 풀잠자리 알을 닮았다. 벼꽃이다. 벼꽃은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흔들리며 제꽃받이로 나락을 여물게 한다.

흰쌀밥의 한 톨 한 톨은 이처럼 가녀린 꽃이 온 몸으로 만들어 낸 기적들이다. 밥이고 생명이자 아름답고 성스러운 신의 미소다. 이때껏 나를 키운 것은 신의 미소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어린 시절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던 흰쌀밥의 보드라운 감촉이 새삼스럽다. 흔들리는 벼꽃에서 3천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를 본다.

하동호는 새끼를 먹이느라 말라버린 짐승처럼 야위고, 물이 빠진 기슭엔 수몰됐던 나무들이 고사목처럼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벼꽃과 우담바라

지난번 여행 때 하룻밤 묵었던 ‘정돌이민박’을 지나면서 길은 임도를 타고 지네재로 향한다. 민박집 주인이 차려준 차반에 반해 배가 무등산만 해졌던 기억이 새롭다. 자기 집에서 묵었던 여행객에 한하여 하동호까지 길라잡이 해준다는 진돗개 ‘정돌이’는 보이지 않는다. 어젯밤 묵었던 길손을 안내하며 저만큼 산길을 가고 있나 보다.

지네재로 가는 길은 밤나무와 감나무 밭의 연속이다. 홀로 가는 고갯길은 쉽지 않다. 산길의 난이도는 길을 가다 뒤돌아보는 횟수에 비례한다. 지네재 가는 길에는 자꾸만 멈춰 서서 뒤를 보아진다.

산다는 것은 저마다 자기의 짐을 짊어지고 숙명처럼 고개를 넘는 것이 아니던가. 짊어진 짐을 감당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고갯길 재빼기에서 반기는 서늘한 바람 한 줌이면 두 다리는 다시금 고개를 넘을 수 있도록 힘차오를 것이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연신 훔치며 오르는데 감나무 밭 농막에서 지아비와 새참을 먹던 중년의 지어미가 낯선 객을 부른다. “식사 안 했으면 한 술 뜨고 가소!”

배고프지도 않았지만 넉살좋게 수저를 끼어 넣을 만한 비윗살도 없는 이 성품을 어찌하랴. ‘조금 전에 막 식사하고 오는 길’이라며 사양하고 지나지만 훈훈한 인심이 가슴에 남는다. 내 누군가에게 이자 붙여 갚아야 할 빚이다.

‘위태- 하동호’구간은 지리산둘레길 가운데 명품 대숲 길을 자주 만나게 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한 술 뜨고 가소!”



위태마을 정류장에서 등산화 끈을 고쳐 맨 뒤 40여분쯤 걸려 지네재에 도착했다. 주산(오대주산)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의 모양이 지네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태와 오율마을을 넘나드는 고개다. 출발지로부터 1.2km 왔다. 시간당 평균 2.5km의 산행 속도를 감안할 경우 지네재의 치받이를 가늠할 수 있다. 목적지 하동호까지는 10여km를 남겨두고 있다. 오른쪽은 지리산 능선을 보며 걷기에 좋다는 주산 등산로다.

내리막 숲길은 그늘지고 솔가리가 깔려 걷기에 편하다. 소나무 우거진 숲에 수적으로 열세인 대나무가 힘겹게 해바라기 하고 있다.

어디선가 보았던 글이 생각난다. ‘소나무는 이기적인 나무다. 뿌리에 독성이 있는데다 밑에 깔린 솔가리는 다른 나무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는 것을 방해한다. 때문에 소나무만 빽빽이 자라는 경우가 많다’고 했던 것 같다.

‘소나무의 이기심’에는 동의할 수 없으나 뿌리를 잘 못 내린 대나무가 안쓰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길고 가냘픈 대나무는 작은 바람에도 온 몸을 휘청거린다.

지네재에서 숲길을 타고 20여분쯤 가다보면 길은 말굽 같은 포장임도에서 왼쪽의 오율마을로 향한다. 맞은바라기 능선들은 발 아래로 아득한데, 매미 울어 이명은 그치지 않고 이명으로 매미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길은 다시 20여분을 걸어 오율마을을 지나 ‘매실와인’ 간판의 건물을 끼고 되돌아가듯 V형태로 꺾어지며 급하게 오른다. 궁항마을로 가는 된비알길이다. 1km 남짓한 거리이지만 극한을 경험한다.

가파른 계단은 하늘로 오르고 소나무를 베어 만든 계단목에는 저승꽃처럼 버섯들이 피어난다.



하늘로 오르는 계단



궁항마을은 마을 터가 활의 목처럼 휘어졌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마을은 옴팍지게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겨울, 궁항리 민박집에서 보았던 새벽 별의 향연이 꿈만 같다. 궁항마을에서는 오대산 가을 단풍이 볼거리라고 하는데 지금은 땡볕이 내리쬐는 8월 하순의 한낮, 기다리기에 단풍은 너무 멀다.

궁항마을회관 앞에서 차도를 가로 질러 농로를 지나면서 길은 오르막 콘크리트 임도로 이어진다. 길에서는 감나무와 밤나무밭 뿐만 아니라 대나무밭도 자주 만난다. 지리산둘레길 가운데 위태에서 하동호까지는 대나무밭을 가장 많이 만나는 구간이기도 하다.

길섶 대나무 숲에 ‘하동군에서 관리하는 판다 대나무 사료’라고 쓰인 플래카드도 걸려 있다. 대나무 잎을 중국으로 수출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국내 어디 동물원의 판다 먹이로 쓴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조금 더 오르면 ET 그림과 함께 부서진 자전거 하나가 콘크리트 바닥에 놓여 있다. 어느 예술가의 작품이다. ET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보름달 대신 작품설명이 새겨져 있다.

간추리면 이렇다. ‘자전거를 타고 지리산으로 오던 ET가 절개지에 부딪혀 죽었다. 개발에 밀려 이전에 그려 놓은 지형이 달라진 탓이다. 인간편의의 방법이 우주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러나 ET는 죽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으로 밤하늘에 작은 불빛을 남겨 놓았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못지않게 작품설치 장소로 지리산둘레길의 첩첩산중을 택한 작가의 상상력이 기발하다. ET의 기다란 손가락 끝에 나의 검지를 맞대면 그가 살아나려나 싶다.

길을 걷는 내내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 칡꽃이 향을 흘리고 있다. 홀로 가는 산길에 칡꽃 향은 마음의 벗이 되어 동행한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보다 칡꽃을 먼저 알았다면 아마도 ‘경국지향’ 쯤은 족히 됐을 성 싶다. 하긴 향(香)과 색(色)이 둘이 아닐 터니 향에도 취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생각의 흐름과 달리 후각은 깊고 긴 들숨으로 향을 쫒는다.

지리산에 추락한 ET. 그의 기다란 손가락 끝에 나의 검지를 맞대면 ET가 다시 살아나려나...


‘경국지향’의 칡꽃



궁항마을에서 포장 임도를 타고 1시간쯤 오르다보면 양이터재에 도착한다. 임진왜란 당시 양씨와 이씨가 피난을 와서 터를 잡은 곳이라 해서 양이터재다.

백두대간이 끝나는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해 김해로 흐르는 낙남정맥이 지나는 곳이다. 이곳을 기점으로 낙동강 수계가 섬진강 수계로 바뀐다. 하동호까지는 5km가량을 남겨두고 있다.

양이터재에서 조금 내려오면 길은 임도에서 빠져나와 오른쪽 숲길로 들어선다. 숲 그늘은 짙어 한 낮에도 서늘하고 소와 쏠이 빚어내는 물소리는 제법 기운차다. 크고 작은 소는 목마른 산짐승들에게 최고의 감로수가 될 터다.

숲길은 40여 분간 이어지다 양이터재를 지나 헤어졌던 임도를 다시 만나 나본마을로 향한다. 임도는 울창하거나 또는 치열한 대나무 숲을 지난다. 대숲에 두 발을 심으면 나도 대나무처럼 비워져 마디마디 공명(共鳴)으로 채울 수 있을 텐가. 비우지 못하는, 비울 수 없는 덧없는 마음만 섧다.

나본마을 앞에 서면 그야말로 ‘느닷없이’ 하동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이 대숲에 가려졌던 탓이다. 나본마을에서 호숫가를 따라 조성된 나무 데크 길은 하동호의 하류인 하동댐까지 2km가량 이어진다. 축구장 8배 크기의 인공 산중호수인 하동호는 인근 60여개 마을의 농사를 책임지는 생명수 역할을 하고 있다. 호수에 담기는 지리산 자락의 산 그리메가 장관을 이룬다.

하지만 호수는 가슴팍을 허옇게 드러내 놓고 가뭄에 기진맥진하고 있다. 새끼를 먹이느라 말라버린 짐승처럼 야위었다. 물이 빠진 호수의 기슭에 수몰됐던 나무들이 고사목처럼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 때 우렁찬 물줄기로 흘렀을 하동댐의 수로도 동굴 같은 입을 벌리고 있다.

처서(處暑)를 사흘 앞둔 끝자락 더위는 맹렬했다. 백년만의 더위라고 했다. 추위나 더위는 기억 속에서 매년 갱신을 거듭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올 여름 더위는 유별나다. 기세 같아서는 계절을 잊은 여름 더위가 크리스마스 때까지 갈 것만 같다.

길 안내

위태- 지네재(1.8km)- 궁항마을(2.9km)- 양이터재(2.2km)- 나본마을(2.8km)- 하동호(2.1km)까지 11.8km에 달하는 구간이다. 하동군 옥정면에서 청암면으로 이어진다. 4시간에서 5시간 소요된다.

들머리인 위태마을까지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다. 하동시외버스터미널(055-883- 2663)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옥종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간 뒤 다시 택시를 이용, 위태마을회관에서 내리면 된다. 원점회귀하여 승용차로 귀가하는데 가장 편안한 방법이다.

승용차로 하동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2시간쯤 소요된다. 하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옥종행 군내버스는 하루 몇 차례 운행하지 않은데다 배차시간이 계절에 따라 변경된다. 사전에 운행시간을 확인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여행자는 광주에서 오전 7시에 출발, 하동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 승용차를 주차한 뒤 오전 9시30분 발 옥종행 군내버스를 이용했다. 옥종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1시간 남짓 소용되며 옥종에서 들머리인 위태까지 택시비는 1만1천원. 궁항마을과 나본마을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또는 하동호를 지나 평촌마을에서도 하룻밤 묵을 수 있으며 다음 구간의 목적지인 삼화실까지 갈 수도 있다.

우담바라를 닮은 벼꽃(출처: blog.daum.net/prettykslee/12618227)


벼꽃

벼꽃은 ‘자마구’라고도 한다. 자마구는 ‘곡식의 꽃가루’를 말한다. 벼꽃이 피는 것은 개화라고 하지 않고 출수라고 한다. 이삭이 나오면서 바로 피기 때문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핀다. 이 때 나락의 껍질이 반으로 갈라지며 나락 하나에 꽃밥을 머리에 인 6개의 수술이 올라온다. 그 사이 수술의 꽃가루가 암술머리로 쏟아지고 껍질은 기다렸다는 듯이 본래 모양으로 닫힌다. 껍질이 벼꽃의 꽃잎인 셈이다. 꽃가루를 쏟아 붓은 꽃실(수술대)은 시들어 버린다. 이 모든 과정이 1-2시간 이내에 이뤄진다.

벼 이삭 한 개에는 90개에서 150개의 나락이 열리는데 한 개의 이삭은 3-5일에 걸쳐 꽃을 낸다.시민전문기자kanjoys@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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