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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의 지리산둘레길을 가다 (3)운봉- 인월구간
입력시간 : 2016. 05.13. 00:00


바래봉은 철쭉으로 불콰하고

람천엔 배부른 물오리의 자맥질

길은 어떤 사람에게는 선택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운명이다. 지리산둘레길 2구간은 선택의 길과 운명의 길이 충돌하면서 그 길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의 거친 숨결이 살아 있다.

운봉초등학교 건너편 서림공원에서 람천 둑방길을 따라 시작하는 운봉-인월 구간은 첫걸음부터 역사의 현장과 맞닥뜨리게 된다.

공원 초입의 좌우에는 험상궂으면서도 익살스러운 표정의 돌장승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고 한 걸음 건너 왼편에는 9기의 비석들이 사열을 기다리는 병사처럼 줄지어 서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들 돌장승을 부부장승이라고 부른다. 마을의 허한 곳을 지키는 오른쪽의 ‘방어대장군’이 남편이고 서쪽의 악한 기운을 누르는 왼쪽의 ‘진서대장군’이 아내이다.

운봉에는 유독 돌장승이 많다. 남원시에 있는 16기의 돌장승 가운데 15기가 운봉읍에 있다. 운봉의 역사와 지리적 환경이 낳은 산물이다.

람천의 피바위 – 바위를 타고 흘렀던 흥건했던 피가 금방이라도 다시 흘러 람천을 적실 것 만 같다.


돌장승과 갑오토비사적비

운봉은 삼한시대 가야와 마한의 국경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최접경이었다. 더구나 기나긴 왜구의 침탈과 임진왜란 등을 온 몸으로 겪어야 했다. 오랜 세월 말 달리는 소리가 운봉고원의 바람소리를 대신했다. 동학혁명과 6·25동란도 이 땅은 비켜서지 못했다.

평안을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은 간절했고 그 간절함이 돌장승으로 표현됐다. 돌장승은 백제의 백성에서 어느 날은 신라의 백성이 되고 그런가 하면 이웃과 형제가 관군과 농민군으로 징집돼 서로의 목숨을 빼앗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들이 하늘에 올린 기도문이다. 왜구에 베이고 끌려가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주린 배를 달래야 했던 백성들의 눈물이다.

줄지어 서 있는 비석에도 평안치 못했던 운봉의 역사가 담겨있다. 당산나무 건너편에 있는 첫 번째 비석은 한쪽 귀퉁이가 깨어져 나가고 비문도 절반 이상 훼손됐다.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跡碑)이다. 말 그대로 ‘갑오년 도적을 때려 잡은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갑오동학혁명 당시 김개남의 동학군을 운봉의 향리였던 박봉양이 민보군을 결성, 방아치와 관음치 전투에서 격퇴시킨 공적을 새겨놓은 비석이다. 비석은 동학의 영남 진출이 좌절된 기록이기도 하다. 박봉양의 문중에서 세운 사적비로 빨래터에서 아낙네들의 방망이질을 당하고 있던 것을 찾아 서림공원에 옮겨 놓았다.

외눈이었던 탓에 ‘일목장군’이라고도 불렸던 박봉양은 후일 지금의 운봉초등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가 하면 항일의병장으로도 활약, 획일적 평가를 거부하는 인물이다.

성리학적 양반사회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던 박봉양의 길과 억압과 모순을 뚫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김개남의 길이 운봉을 무대로 삼아 한 판 승부로 맞부딪힌 것이다.

서림공원에서 시작한 람천 둑방길은 이성계의 왜구 토벌비가 있는 비전마을까지 10리가 넘도록 샛길 없는 외길로 이어진다.

람천은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운봉을 지나 인월, 용유담, 경호강,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른다. 둑방길은 경운기가 다닐 만큼 넓어 가족단위로 걷기에 알맞다.

그늘을 선사하던 둑방길의 벚나무도 얼마 못가 람천 정비사업으로 자취를 감추고 5월 초순의 햇볕은 창끝처럼 따갑게 온 몸의 세포를 파고든다.

오른쪽 들판 넘어 바래봉은 철쭉꽃으로 물들어 불콰할 테지만 왼편의 람천에서는 배부른 물오리들의 한가한 자맥질이 심심찮다. 한낮의 태양이 만든 어린애 같은 내 그림자와 함께 걷기를 한 시간 남짓, 둑방길이 끝나고 대첩교 건너 비전마을이다.



황산대첩과 피바위, 그리고 조선건국

비전마을 어귀에는 가왕 송흥록(宋興祿) 생가와 그 왼쪽에 이성계의 ‘황산대첩비지’가 인접해 있다. 황산대첩의 현장인 피바위는 인월 방향의 람천에 남아 있다.

바위는 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진 채 수백 년 전의 사건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피바위의 증언을 먼저 들어보자.

-1380년 고려 우왕 6년, 삼도 도원수 이성계는 2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서 왜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2만여 명의 왜구를 맞아 싸우고 있었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날이 어두워지자 이성계가 하늘을 우러러 ‘달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에 응답하여 밝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휘하장수 퉁두란이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추자 적장은 투구끈이 벗겨지는 것을 막으려고 입을 벌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도원수의 화살이 아지발도의 벌어진 입을 꿰뚫었다. 왜구는 섬멸됐고 핏자국은 바위에 남아 있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무용담이 용비어천가의 ‘해동육용(海東六龍)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처럼 과장되었겠지만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하고 있다.

피바위는 아지발도를 비롯한 왜구들이 흘렸던 피의 흔적인 양 붉게 물들어 있다. 피바위에 서면 바위를 적신 흥건했던 피가 금방이라도 다시 흐를 것만 같고 신음소리와 피내음이 진동하는 듯하다. 피의 흔적은 소름끼칠 만큼 사실적이다. 엄연한 사실에 무심한 시간들이 켜켜이 쌓이는 것이 전설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다. ‘왜구’라는 이름으로 이국의 낯선 땅에서 원귀가 된 그들의 영혼 또한 이제는 편히 쉬기를 바랄뿐이다.

아무튼 황산대첩은 이성계의 명성이 고려 땅에 울려 퍼지는 계기가 됐다. 이는 그가 후일 조선을 세우는 원동력이 된다. 피바위는 조선 건국의 시발점인 셈이다.

하지만 이 곳 피바위는 지리산둘레길의 으뜸가는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이지 코스에서 제외돼 있다. 코스에 포함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피바위는 황산대첩비를 지나 군화동 마을 끝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인월방향으로 1km 쯤 직진해야 한다. 그 후 왼쪽의 ‘달오름 마을’초입에서 람천 둑길을 따라 U턴하듯 800m쯤 거슬러 오르면 체험하듯 바위를 살펴볼 수 있다.

람천 둑길 끝에서 만나는 황산대첩비지는 이러한 이성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때 건립했다. 마을이름 또한 비(碑)앞에 있다 하여 비전(碑前)마을이다.

하지만 아지발도의 후손들은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으로 기어이 운봉을 휩쓸고 지난다. 임란 때는 운봉을 거쳐 남원성을 함락시켜 저항하던 1만여 명의 병사와 주민을 도륙하고(만인의총)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황산대첩비를 정으로 쪼아 비문을 훼손하고 파괴했다. 이 때 파괴된 황산대첩비의 부서진 조각은 이곳의 파비각(破碑閣)에 보존돼 있다.

부끄러운 역사를 정으로 쪼아 없애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의 내일을 정으로 쪼아 없애고자 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임을 그들은 모른다. 그래서 일까. 일제의 어리석음은 지금도 위안부 문제에서 보듯 여전히 진행형이다.



동편제와 거문고 가락의 본고장

마을 어귀에는 가왕 송흥록의 생가와 국창 박초월의 생가가 나란히 잘 복원돼 있다. 동편제 창법을 창시, 판소리의 중시조로 추앙받는 송흥록은 귀신 울음소리를 내는 귀곡성과 가장 느린 장단인 진양조를 완성했다.

송흥록으로 인해 판소리는 표현력이 증대되고 민족예술로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됐다. 신재효는 그의 노래 솜씨를 당나라 시인 이태백에 비유했다. 송흥록은 운봉출신이고 박초월은 순천 출신이나 운봉에서 성장했다.

예전에는 비전마을 앞에 길을 가는 사람이 말에서 내려 황산대첩비를 보고 절을 하는 하마정이 있었다. 하마정에는 기녀와 소리꾼이 상주했으니 비전마을이 동편제의 발상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방문록에 이름을 적은 뒤 마을 어귀 당산나무 그늘 아래 앉아 한 줄기 바람으로 창끝 같은 햇볕을 털어낸다. 판소리 한 가락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귓전에 파고든다.

길은 비전마을과 군화동마을을 거쳐 람천 위 화수교를 지나는 24번 국도를 건너면서 새롭게 시작한다. 이정표처럼 위치한 리조트건물(현재는 폐업)을 끼고 가파르게 오르다보면 계곡을 막아 조성한 옥계저수지를 만난다. 저수지 물위에 드리운 서늘한 산 그리메가 한폭의 그림이다.

이곳 옥계동은 신라 경덕왕 때 거문고의 대가인 옥보고가 50년 동안 은거하면서 30여곡의 거문고 가락을 지었다는 곳이다.

민초들의 아픈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는 운봉은 이처럼 동편제의 발현지이자 고장이자 거문고 가락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아픔이 상처로 남으면 원한이 되지만 아픔이 노래가 되면 치유가 되는 법이다. 운봉의 지리산둘레길은 치유의 길이다.

길 양켠 오리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고개에 오르는데 저만큼 은사시나무 몇 그루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건넨다. 흥부골자연휴양림을 지나면 인월까지 계곡을 따라 내리막길이다. 훌쩍 커버린 내 그림자를 본다. 인월이 멀지 않음이리라.

전촌마을 입구의 소나무 숲


길 안내

조선시대 통영에서 진주와 남원, 전주를 거쳐 한양으로 가던 통영별로가 지나던 곳으로 24번 국도와 연하여 있다.

서림공원- 전촌마을(3.6km)- 비전마을(0.2km)- 군화동마을(0.9km)- 옥계저수지(1.1km)- 흥부골자연휴양림(2.1km)- 월평마을(1.7km) 까지 9.6km 구간이다.

오른쪽으로 바래봉과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부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수정봉과 고남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옥계호부터 흥부골자연휴양림 구간의 숲길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늘이 없는 제방둑길이나 콘크리트길이어서 걷기에 조금은 불편하다. 그러나 둘레길 가운데 옛길에 얽힌 역사적 흔적과 인물들의 숨결을 가장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광주에서 승용차로 운봉까지는 1시간 남짓 소요된다. 길 안내는 ‘서림공원’을 목적지로 설정하면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남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린 뒤 건너편 정류장에서 운봉행 버스로 갈아탄다. 주천행과 달리 운봉행은 20∼30분 간격이다.

종점인 인월의 월평마을에 민박집이 많고 1km쯤 떨어진 인월면에는 깨끗한 모텔도 있어 숙소와 식사 해결은 불편하지 않다. 색다른 음식을 원한다면 월평마을 ‘지리산나물밥’ 의 나물밥이나 지리산둘레길 3구간 출발지인 구인월교 건너 ‘두꺼비집’의 어죽을 먹어 볼만하다. 저녁이라면 ‘지리산나물밥’ 마당 건너편 ‘DaDa 갤러리’ 노천카페에 들려 밤하늘 별빛을 조명삼아 맥주나 지역 말걸리인 ‘야관문’을 한 잔하는 것도 둘레길이 주는 운치다. 도회풍을 기대한다면 인월안내센터(063-635-0859) 인근 ‘제비’ 카페에서 흐르는 음악과 함께 분위기를 타는 것도 괜찮다.시민전문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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